수원(水原)이란 한자의 뜻은 ‘물의 근원’이다. 역사적으로는 고구려 시대에는 수주(水州), 통일신라 시대에는 수성(水城), 고려 전기에는 수주(水州), 고려 후기에는 수원(水原)이라 하였다. 이처럼 수원은 대대로 물과 관계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현재 수원과 주변에 있는 저수지는 다른 어느 곳보다 산재해 있다. 일정규모가 있는 저수지로 수원시내에 있는 것은 광교저수지, 만석거, 서호(축만제), 일월저수지, 원천저수지 등이 있다. 행정구역 경계에 있는 저수지로 용인시에는 신갈저수지, 의왕시에는 왕송저
유교의 나라 조선 궁궐의 근정전 기둥에 흰색 띠가 있는 사진이 발견되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사진은 아니고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 그대로 표현하였기에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이 책은 프랑스인(Raoul Villetard de Laguérie)이 구한말 한국에 와서 생활하고 글을 쓴 것으로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의 정치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문제의 사진에서 근정전 기둥에 있는 흰색의 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어떤 이는 주련(柱聯)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하지만, 주련은 기둥(柱)
영화역과 화성자료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영화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한글판), 정조 실록, 일성록, 수원부 읍지 등이 있고 그림은 화성전도(6폭 병풍)와 화성반차도(1910)가 있다. 근대 자료로는 광무양안과 지적원도(地籍原圖) 및 토지조사부가 있고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항공사진을 참고할 수 있다.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1), 부편 1>, 영화역편에는 ‘장안문의 바깥 동쪽으로 1리(400m)에 위치하고 정당과 삼문이 남향을 하며 규모는 52칸이라 기록하고 있다.화성지(
역사적 신도시를 만든 정조는 새로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경제의 원동력인 양재역(良才驛-驛館)을 화성으로 이전한다. 이것이 영화역이다.영화역(迎華驛)의 이름은 화산(華山)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정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영화역은 약 100년간 운영되다가 1896년 용도폐지 되고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졌다.지난 2013년에 장안문 외부에 있는 ‘영화동 주민센터’ 일대(거북시장)에서 지역 활성화를 위해 영화역 복원 고유제를 지냈다.수원시에서도 영화역 복원을 위한 용역을 시행하고 보고서를 발간하였지만 영화역의 위치를 찾지 못하였다.하
정조는 아버지 묘가 있는 수원화성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조선 최고의 신도시로 만든다. 이 도시가 크기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여러 우대정책을 펼친다. 이주민을 위한 정책사도세자 묘를 조성하면서 철거한 244가구를 신읍으로 이주대상으로 삼고 대대적인 지원을 한다. 이어 도시가 운영될 수 있도록 관원, 양반, 상인,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모이게끔 특혜도 준다.백성들은 나라에 내는 세금도 힘들지만, 나라에서 빈민구제를 위해 운영한 환곡이 오히려 고리대로 변해 고통을 주고 있었다. 이에 이주민에게 10년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원찰로 건축되어 나라의 지원을 받았으며 해마다 제를 올렸다. 하지만 정미조약으로 왕실의 지원이 끊어지자 모든 원찰들은 서둘려 유교적 색채를 걷어낸다. 용주사 역시 그 뜻을 따라 원찰의 틀을 벗고 선종 사찰의 길을 걷고 있다.이번 주제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호성전으로 용주사를 세운 목적에 부합하는 중요한 건물이다. 사찰에서 사당을 논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만, 문화재적 입장에서 원형과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바로 조포사(造泡寺, 제사에 쓰이는 두부를 만드는 사찰)의 건축을 시작한다.
사도세자 원찰인 용주사에는 일반사찰과 달리 특이한 부분이 많은데 특히 출입문 부분에서 발견된다. 일주문 대신 홍살문이 있고 금강문 대신 삼문(三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삼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용주사의 홍살문을 지나면 웅장한 한옥이 나타난다. 거대한 삼문과 양쪽에 기다란 행랑이 길게 뻗어있는 것이 관아나 왕릉의 재실 같고 안동의 커다란 양반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보통 사찰 출입문은 문짝이 없어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용주사는 문짝이 달린 거대한 솟을삼문이 있어 출입이 편하지 않
사찰 가는 길에는 여러 문이 있는데 일주문과 금강문 및 천왕문 등이다. 이 문들은 문짝이 없는 ‘문 없는 문’으로 경계의 의미가 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세속의 흔적을 씻는 의식으로 보며 출입통제 의미는 없다.특이하게 용주사는 이런 상징의 문을 창건 시기에는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유교를 상징하는 홍살문을 세우고 거대한 삼문을 세워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유교의 상징인 홍살문(紅箭門)이 왜 불교사찰인 용주사에 세워져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용주사 앞 홍살문- 좌 :구한말 , 우:현재>보통 홍살문은 궁전, 관아, 능, 묘
경북 안동시는 술과 음식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는 많은 반가(班家)에서 제사(祭祀)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는 예(禮)를 기반으로 하므로 조상의 숭배에 대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유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은 제사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사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 시대 제사음식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두부(豆腐)로 지금과 달리 고급음식으로 취급되었다. 두부 역사는 고대 한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에서는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아 우유를 구하기 힘들어 콩으로 만든 두유를 대용하였고
문 화 재 : 사적 제193호위 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능의형식 : 단릉능의조성 : 1408년(태종 8) 구리시에 위치한 사적 제193호 동구릉에는 건원릉(健元陵)을 포함하여 총9개의 능이 있다. 구리시 검단산 아래 자리잡은 동구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손꼽히며, 그중 혁명가 태조 이성계가 누워있는 건원릉은 아홉 개 동구릉 중에서 가장 깊은 곳,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에 들어서서 홍살문, 수릉, 현릉을 지나 약1.5km 이르면 건원릉(健元陵)을 만날 수 있다. 조선왕릉 40기중 능호가 유일하게 두
문 화 재 : 사적 제197호위 치 : 경기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능의형식 : 동원이강릉능의조성 : 468년(예종 1), 1483년(성종 14) -능의 구성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