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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역((迎華驛)-下영화역은 영화동이 아닌 조원동에 있다

영화역과 화성자료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영화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한글판), 정조 실록, 일성록, 수원부 읍지 등이 있고 그림은 화성전도(6폭 병풍)와 화성반차도(1910)가 있다. 근대 자료로는 광무양안과 지적원도(地籍原圖) 및 토지조사부가 있고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항공사진을 참고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1), 부편 1>, 영화역편에는 ‘장안문의 바깥 동쪽으로 1리(400m)에 위치하고 정당과 삼문이 남향을 하며 규모는 52칸이라 기록하고 있다.

화성지(華城誌, 1831)에서는 영화역은 본부(관아)의 북쪽 3리(1,200m)에 있고 규모의 합계가 64.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부에서 북쪽 3리’는 행궁에서 장안문까지 거리가 ‘2리’이고 장안문에서 영화역까지는 1리가 되어 화성지나 의궤의 내용은 일치한다.  

영화역도(迎華驛圖, 화성성역의궤 수록)에서는 역관 뒤에 낮은 언덕이 보이고 말 10마리가 풀을 뜯고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관의 동쪽에 개울이 남쪽으로 흐르고 마을 중간에서는 서쪽으로 흘려나가고 있다. 이를 분석하면 역관 뒤에 말이 뛰어 놀 수 있는 낮은 언덕과 앞의 개울은 위치 추적에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된다.

화성전도(華城全圖 6폭 병풍, 1796)와 화성반차도(華城班次圖, 1810)는 그림 자료로 영화역 위치를 추정하면, 마장산(현재 영산공원)을 중심으로 첫 번째 산줄기는 북서로 뻗어가 만석거에 이르고, 두 번째 산줄기는 서쪽으로 가서 장안문에서 지지대로 이어지나오는 큰 길에 이른다.

영화역은 바로 두 번째 산줄기를 뒤에 두고, 개천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였다. 화성전도의 영화역 뒷산은 영화역도의 그림에서 나오는 작은 언덕(산)과 같은 존재이다.

광무양안(光武量案, 1900,1903년)은 두 자료가 있으며 내용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1903년에 제작된 양안이 더 자세하게 나와 이를 기준으로 정리해 본다.

수원부양안 북부면 하편 강(岡)자편에는 찰방진(察訪鎭, 영화역의 다른 이름)을 비롯한 45필지의 내용이 있다. 42번지가 찰방진이고 주변 필지에는 37번지-김정건, 38번지-이흥집, 39번지-임낙서가 있고 이를 제외한 40, 41, 43, 44번지는 영화마위(迎華馬位, 영화역를 위한 땅)로 되어있다.

찰방진 주변(37~44번지)을 하나의 블록으로 만들어 보면 뒤쪽에는 산이 있고 하천은 동측과 남측에 있어 영화역도(迎華驛圖)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항공사진(1945)은 이곳이 개발되기 이전으로 원지형을 읽을 수 있다. 화성반차도에서 표현된 산줄기를 여기서는 확인이 가능하다. 즉, 마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모양이 항공사진과 화성반차도에서 똑같다. 단, 항공사진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농지로 개발되어 나무가 없어져 산의 형세는 없어졌지만 옛길을 따라가면 화성반차도에서 나온 영화역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좌-화성반차도, 우- 1947년 항공사진>

종합

지적원도를 놓고 마장산에서 서쪽으로 가는 산줄기에서 개천이 발생한 지점을 찾고 개천이 남쪽으로 내려와 산기슭에서 서쪽으로 꺾이는 곳은 한 곳 밖에 없다. 이곳이 바로 항공사진과 화성반차도를 비교하여 발견한 장소와 같다. 또 이곳을 광문양안의 찰방진 주변을 블록으로 묶어 도면으로 만들어 지적원도에서 대입해도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 곳의 주소는 지적원도에서 ‘조원리 639와 640번지’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여러 대지로 분할되었지만 모번은 옛날과 같은 번지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검증에서 첫 번째, 영화역 그림 중 최후의 것은 ‘화성반차도’로서 이를 도면화 하면 대지 한 변의 길이가 약 54m가 된다. 이는 광문양안에서 나오는 길이 56m와 비슷하다. 또 양안의 내용을 토대로 만든 도면을 지적원도에 오버랩을 해도 잘 맞아 떨어진다.

두 번째, 현장조사를 하니 추정한 대지는 평지이고 뒤편은 경사지였다. 지금은 모두 주택지로 변했지만 ‘영화역도’에서 말이 놀고 있는 야산이 유추가 된다.

세 번째, 사료에서 영화역과 장안문의 거리는 1리(400m)이고 여기서 추정한 곳은 약1.5리(600m)가 된다. 하지만 이 정도 차이는 당시 거리측정 기술로 볼 때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 토지조사부(일제강점기 제작)에서 추정된 대지와 뒤편의 대지 즉 말이 있던 부분까지 모두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추정한 곳이 국가기관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화역의 주소는 구한말 시기에는 북부면(北部面)에 속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용면(日用面) 조원리(棗園里)로 변경되었다. 이번 연구조사로 영화역이 지금 영화동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화동의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역사가 더해진 영화역의 복원을 기대해 본다.

 

김관수 기자  moa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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