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복원이 필요한 사도세자 사당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원찰로 건축되어 나라의 지원을 받았으며 해마다 제를 올렸다. 하지만 정미조약으로 왕실의 지원이 끊어지자 모든 원찰들은 서둘려 유교적 색채를 걷어낸다. 용주사 역시 그 뜻을 따라 원찰의 틀을 벗고 선종 사찰의 길을 걷고 있다.

이번 주제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호성전으로 용주사를 세운 목적에 부합하는 중요한 건물이다. 사찰에서 사당을 논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만, 문화재적 입장에서 원형과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바로 조포사(造泡寺, 제사에 쓰이는 두부를 만드는 사찰)의 건축을 시작한다. 묘 이장 1주년을 기념하여 조포사의 낙성식을 하고 이름을 용주사(龍珠寺, 용이 구슬을 물고 승천)라 하였다. 이는 사도세자의 묘가 풍수상 반룡농주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능침원당사찰(陵寢願堂寺刹)인 이곳에 사도세자를 위한 제각(祭閣)인 호성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은 정조에게 사찰보다 더 중요하였지만, 사찰에 맞지 않는 유교 건물이어서인지 유독 수난을 겪게 된다.

현재 호성전은 1988년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원 건물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1970년 항공사진을 보면 창건기의 건물은 대부분 건재한데 호성전의 빈자리에만 초석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여러 사진 모두에 호성전이 보여 소실시점은 광복 이후로 한국전쟁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1970년대 항공사진)

용주사의 낙성식이 있던 날(1790년 10월 6일) 정조 기록에는 ‘호성전은 6칸, 중문(中門) 3칸, 담장 16칸(38.4m)’으로 되어있다. 이 건물은 사찰내부에 있지만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중문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진에 의하면 호성전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양성마루(암기와를 쌓고 표면에 회 바름)로 되어있고 담장도 보여 실록의 기록과 내용이 같다.

복원된 현재 호성전은 창건기의 건물과 달리 양성마루가 없고 팔작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되어 위계가 매우 낮다. 그리고 중문과 담장은 없고 중문 자리에는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이 있어 창건기의 당당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맞배지붕으로 복원된 호성전)               

이 탑에 연혁을 찾아보니 서예가 김충현(1921~2006)이 글을 썼으며 호성전이 빈터로 있던 1981년에 세워졌다. 아마도 호성전의 복원이 경제적으로 벅차 우선 탑을 세워 정조의 뜻을 기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호성전의 위치는 대웅전의 동쪽이고 사도세자의 묘는 대웅전의 서쪽에 있어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여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사당(祠堂)은 보통 대지의 중심에서 동북방향 즉 간방(艮方)에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방은 음사택(陰舍宅)으로 귀신의 방향이라 하여 이곳에 사당을 설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원화성 행궁의 간방에 화령전이 위치하고 안동 하회의 충효당이나 양진당의 사당도 같은 방향에 위치한다.

조선 시대 조성된 많은 원찰에 왕실의 사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법주사와 고운사 등에서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법주사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가 있다. 이 원당의 축(軸)은 법주사 중심축과 조금 틀어져 있으며 중심건물인 5층 팔상전의 간방에 있다.

또 고운사는 위축원당(爲祝願堂) 사찰로 영조의 장수를 위해 세워졌는데 영조의 어첩이 보관된 연수전(延壽殿)이 주법당인 극락전의 간방에 있다.

그래서 호성전의 위치는 용주사의 간방에 설치된 것으로 당시 규범에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용주사의 호성전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타 종교시설로 배타적인 면이 있어 터부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융릉(사도세자의 묘)과 연결고리를 가진 중요한 요소로 문화재적 가치는 높다.

만약 용주사와 문화재청이 합의점을 찾아 원형복원이 추진된다면 정조문화 완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건축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