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이 정해준 목수 " 이광노사부

 
구국립수위과학검역원 (안양)
 
무애건축미술관
 
 
무애 이광노사부 작품집에서 발취

무애건축미술관

“나는 하늘이 정해준 목수“ 라는 생각으로 건축과로 돌아왔다.

학덕(學德)을 겸비(兼備)한 선비 이광노(李光魯)사부-1

건축은 서비스입니다.

건축사는 자신의 능력만큼 일을 맡고, 맡은 일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서비스하라는 겁니다. 10년만 그러 자세로 일하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될 것입니다.

*국회의사당(합작), 서울대병원, 남산어린이회관, ‘60~62국립수위과학검역원(안양), ’67~‘68 안양컨트리클럽 클럽하우스등 현역시절170여점 작품을 남겨 건축업 하는 선친 손에 이끌려 경성공업전문학교(일본인학교)에 진학... 모스크바 유학 꿈꾸며 평양  *세계적 건축설계사소 ‘아이엠페이’에서 연수...국내최초로 미국식 설계기법 도입 (안양 국립가축위생연구소) *朴正熙최고의장 KBS남산방송국 설계 맡겨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는 핀란드 태생 모더니즘의 아버지 ‘알바르알토’

“난죽기전에 150명 남짓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조용한 山上기도원을 짓는 게 꿈이요. 10여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교회를 못 다닌 것이 못내 아쉬어서...”푸른 산 정상에 330m2(100평) 정도의 백색기도원, 그가 도면으로 그려 색을 입힌 기도원은 양 때가 목동의 인도로 도착한“오아시스”였다! 이광노사부는 서울대 건축과 명예교수다.

그의 아호를 딴 무애無涯건축연구소(1955년 설립) 한국현대건축을 선도했다. 지난2011년1월8일 오후 서울중구태평로<조선일보사옥>근처 서울중구세종대로21-48 光安빌딩. 그의 사무실은 한국현대건축을 개척한 선각자의 체취로 가득했다. 국회의사당(합작), 국립박물관심사, 남산 어린이회관 설계 등 한국의 건축사를 장식할 만한 모형들과 자료들.... 1949년 그는 21세 나이에 ‘49년 대구시청사 현상설계(합작1등 당선)를 시작으로, 6.25전쟁기간동안 국군충혼탑, 유엔 전우탑, 등을 설계하는 등 청년건축인 활동 한다.

1954년 도미渡美하여 세계적 건축사무소 '아이엠페이(I.M.PEI)'에서 세계적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에게 세계적수준의 건축기법을 전수 받았다.

28세 때에 서울공대 건축과 교수로 부임 30여 년 동안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남긴 170여 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극장. 크리스쳔 아카데미-근대건축을 충실하게 해석해 한국적으로 표현한 작품 중국대사관. 서울대규장각도서관-전통미들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李光魯사부는 1928년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고 바다가보이는 경기도개풍군임한면유천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나이 7살 때 이희승(경기의왕시출신) 선생과 죽마고우인 선친 李盛根을 따라 개성(안성,수원과 함께 경기3대 경제도시) 으로 이주했고 만월국민학교를 다니다. (수원서 1학년2학기~3학년2학기) 서울 아현국민학교로 전학을 와서 1941년 3월 졸업한다. 그 후 1942년 4월 주변경치가 좋은 경복중학교(景福高)을 들어가 ‘45년 졸업한다.

“중학교 3~4학년 때 애국청년동맹을 만들어 비밀서클 활동도 했고, 이광수<흙>에 심취해 초등학교 선생이 될 꿈도 꾸었다.”면서 “건설업(한일토건)을 하는 아버지가 家業을 잊게 하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고공 서울대전신-일본인학교) 건축과에 원서를 냈다”고 했다.

1945년 4월, 그는 경성공업전문하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광노는 흥미를 일어가고 있었다.(타율적입학도원인-편집자주) 건축을 “예술“로 생각했던 이광노에게 교수들은 ‘시멘트골조’니 뭐니 하며, 당장 써먹을 ‘기술‘만 가르쳤고, (태평양전쟁말기영향-편집자주) 설상가상 광복정국으로 교내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혼란했다. 그의 말이다.

”광복을 맞고 좌우익갈등이 벌어지자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 철학과로 옮기려했어요. 그나 그는 “공산주의 원리에 대해서는 찬성했지만, 방법론에 대해선 반대했다.” 그러는 사이 건축란 무엇인지 맛을 보게 돼 철학공부(朴相鉉翁에게 사사)를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국립도서관에서 영국의 베니스터 플레처(Sir Banister Flecher)경이 쓴<건축사>(A History Of Architecture)를 비롯해 건축수필집을 탐독했다. 그는 건축사를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낭만적, 문학적, 철학적 요소들이 모두 건축속에 용해 될 수 있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광노는 1947년 봄 서울 아현동 집을 나서며 부오님께 ”모내기를 다녀 오겠다“고 둘러고 북한지역으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해주부근에서 ‘로스케’(소련군인)에 잡혀 유치장에서 사을 보낸 그는 사리원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을미대 에 올라 대동강을 굽어보며 분단의 현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는 끼니를 위해 노동판을 전전하다 탄광으로 일하러갔다가 간첩으로 오인 되 감옥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강냉이 죽만 먹기도 했다. 그는 ”그때 문득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 고 생각했다.“ 모스크바는 글렀다, 하루빨리 내려가야 겠다‘ 고 판단하고 남행길에 올랐다.

38선의 경계가 강화됐으나 가가스로 철원을 통해 집으로 귀한 한 후 돌연 陸士를 지원다.” 만약 입학했다면, 박정희대통령과 동기(2기)가 되는 거였구요. 1차시험 합격후 구두시험 치러 갔더니 日本刀 차고 소위계급장을 단면접관이 ’장차 우리나라는 총칼로 할 것이 아니라 기술로 겨뤄야 한다.‘ 며 광복 후 조국을 건설할 기술자가 군에 들어오면 어떡하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면서 ”그때 불현듯 내가 실수 했구나“ 란 생각이 들어 돌아섰다고 한다.

”나는 하늘이 정해준 목수”라는 생각으로 서울공대 건축과로 돌아왔다고 한다.

月刊 朝鮮 2/2011 인물연구 한국건축학계의 원로 李光魯 서울대명예교수吳東龍 월간조선 기자382~386p 발취 요약

인터뷰 ;이광노 교수의 건축세계 創作과 學文사이

“이건영: 문 당시 학교에 계신분 들은 어떤 분이었나요.답: 해방직후 이균상 선생님 혼자 계셨죠. 그리고 내가 서울대학교에 있을 때는 이균상교수 외 김형걸, 김중업씨 그리고 송민구선생도 일부시간을 맡으셨고 강상천, 염창현씨 그리고 황희근씨가 계셨는데 6.25때 이북으로 가셨어요. 2학년 48년부터 이천승 선생님을 찿아가서 사숙을 한거예요. 47년1학년 때는 성적이 내가 전학년에서 1등일 거예요.

그다음 1952년 충혼탑 현상설계가 있고, UN전우 탑 현상설계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건축에  데뷔를 했습니다. 김중업, 정인국씨등 선배건축가들이 다 응모했는데 내가 둘다 1등 당선하게 됐거든요. 그때 초량에 교통부시설건축과 사무실이 있었는데 거기에 6.25때 모든 건축인들이 모였습니다. 송민구씨나 엄덕문씨 정인국씨, 김희춘씨 이런 분들도 같이 했는데 내가 실무자였지요.“

6.25후에 한미재단에서 주택 원조 자금을 주게 되었지요. 거기에서 미국에가서 미국식으로 좀 배워 와서 집을 짓도록 하자고 하여 정부에서 위탁으로 가게 된 거죠 강명구씨, 유덕호씨, 이건영씨등 몇 분이 같이 갔습니다. 주택사업을 위한 트레이닝이었지요.

無涯 李光魯敎授建築作品集14~15쪽

2017.3.3 무애건축미술관방문 무애는 연노하시여 기존인터뷰를 요약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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