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집 이야기 ⑤ - 신동규 교수

신동규 교수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⑤

 

신동규 교수
  •  신 동 규
  • - 경기과학기술대학교 건축인테리어과 교수
  • - 건축학 박사
  • - 건 축 사 
  • - 건축시공기술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과장되어 나타나곤 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초원 위의 집, 숲 속의 통나무집, 정원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집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캐나다와 미국의 접경에 있는 The Thousand Islands는 1,864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비하고 아름답다 하여, '신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이 섬에는 그림 1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그림 같은 집들이 많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집에 대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림1] 초가집의 가을철 이영이기, 수채화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와 영화는 이런 사람들의 이상향을 찾아내어 세트장을 꾸미고,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착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이상적 이미지는 자기가 직면한 현실 앞에서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집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집을 사거나 지어 본 사람은 ‘마치 도를 닦는 기분으로 욕심을 내려놓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 대부분은 집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와 더불어 집으로 인한 혜택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나 짓고 난 이후의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왜 집에 대한 이상과 현실은 다를까? 우리가 가진 집에 대한 바람은 가장 좋은 것을 꿈꾸고, 그것은 현실의 내가 아닌 크게 성공한 내가 가질 수도 있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하는 일의 첫 번째는 건축주가 가진 이상향과 대지, 법규, 경제성, 공사기간, 기술수준 등의 현실적 조건 사이의 간격을 좁혀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좋은 집에는 여러 조건이 있겠지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보기 좋은 집’, ‘팔기 좋은 집’, ‘살기 좋은 집’이다.

[그림2] Thousand Islands에 있는 주택으로 이상향의 실현으로 보인다. 사진: 신동규

첫째, ‘보기 좋은 집’은 디자인된 집을 의미한다.

건축디자인이란 조형적으로 완결된 아름다움을 건축 가능하도록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보기에 좋은 집은 조형적으로 완결되어 있어서 어떤 부분을 더하거나 빼면 아름다움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된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그림2]의 칼라트라바 발렌시아 예술 과학센터처럼 당초 예산을 크게 초과한 천문학적 건축비로 비난을 받기도 하고, 안도다다오의 작품에서처럼 보기에는 좋지만 실제 사용에서 불편함을 겪는 건물들도 많다. “이름 난 건축가의 집은 으레 비가 샌다”라는 농담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조형적 아름다움을 우선하여 추구하다 보니 공법적인 해결이 어렵거나, 비용이 많이 들거나, 사용상 불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건축물에서 과도한 디자인을 흔하게 접한다. 거주자의 사용상 편리함이나 경제적 가치보다는 형태적 특별함으로 건축가와 건축주의 가치를 들어내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림3] Santiago Calatrava Valls, 발렌시아 예술과학센터, 사진: 신동규

둘째, ‘팔기 좋은 집’은 경제적 투자가치를 우선하는 집이다.

적은 투자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는 집도 있고, 주방 및 욕실설비와 마감재를 유행에 맞게 고급화하여 구매자의 관심을 끄는 집도 있으며, 임대료를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은 집도 있다. 또 도심으로의 접근성과 자녀 교육을 고려하여 살 곳을 선택하기도 하고, 지역이 가진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하여 집을 구하기도 한다.

팔기에 좋은 집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를 두루 만족시키는 장점을 갖추어야 함으로 미래 경제적 가치를 담보로 가족의 행복을 포기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살기에 편한 집’이다.

인간이 집을 짓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이후 사람이 추구한 것은 살기에 좋은 집이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피난하기 위한 것에서 출발하여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물이다. 현대사회에 와서 상품가치가 우선시 되면서 보기에 좋고, 잘 팔리는 집이 좋은 집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집의 본래 가치는 매몰되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우선시 되었다.

과연 우리는 살기 좋은 집을 추구하고, 또 그러한 집에 살고 있는가? 나와 가족의 삶을 포기하고 남을 위한 집을 구하지는 않았는가?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의 행복과 삶의 질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살기에 좋은 집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활과 잘 대응되는 집이다. 가족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집이다.

집은 사회와 주거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집의 공간, 설비, 형태를 쉽게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의 연구(신동규, 건축적 적응행위에 의한 주거공간 변형에 관한 연구, 2002,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주택은 크게 13년 내지 15년마다 중대한 개조가 일어나며, 개조 대상은 설비의 현대화, 공간의 확장, 창호를 비롯한 마감재의 변경 등이다. 또한 주택은 가족 구성의 변화, 기술과 설비의 발달, 그리고 주택의 물리적 노후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주택은 홑집의 형태로 덧붙여 짓기 쉬운 형태였다.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마당과 대청마루가 있어서 필요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양 현대건축이 도입되면서 방들의 기능을 특별한 목적으로 고정하면서 우리의 집은 면적이 커지고, 방의 수는 많이 늘었지만 생활의 변화에는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완벽한 집을 위해 너무 애쓸 필요가 없다. 살면서 필요한 공간을 더하여 짓고, 합하고, 고치고, 덜어 내면서 살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의 설계를 담당하는 건축가도 너무 특별하거나 조형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거나, 팔기에 적합한 집을 설계하려고 하지 말자. 또한 완벽한 집을 지으려고 하지도 말자. 집은 완성품이 아니라 그 안에 살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꾸며가야 하는 대상이며, 지을 때보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 그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그림4] 안동 하회마을, 한국의 전통 민가에는 생활의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사람의 적응행위가 담겨있다. 사진: 신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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