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철필(鐵筆)에서 잉크가 꿈처럼 흘러나온다' – SPACETIME OF LIGHT 展

박병제 건축사는 인사동 나인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SPACETIME OF LIGHT 展(2월 21일~3월 4일)을 진행 중이다. 가늘고 짧은 획들을 그어 표현하는 펜화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화가 박병제의 면모는 어떠한지 또 건축과 회화의 영역을 오가는 삶은 어떤지 묻고자 만났다.

박병제 건축사
박병제 건축사

갤러리를 채우고 있는 박병제 건축사의 작품들에서는 많은 스트로크(stroke)들이 교차하고 중첩되어 이룬 면면에서 심오한 색감과 질감이 드러난다. 선의 밀도로만 색의 깊이를 표현하기에 정교한 직조 작업과 같은 느낌도 선사한다. 다층으로 색이 쌓여 밝고 화사한 빛이 섞여 스며나오는 작품들에서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SPACETIME OF LIGHT 展
 SPACETIME OF LIGHT 展

“기억이 안 날 때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동안 그린 작품들로 전시를 한다고 해서 제가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림, 글, 건축과 같은 표현의 여러 방식에 대해 늘 고민해 왔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저의 존재감을 모르고 있다가 알아차리는, 존재 증명의 그런 계기가 되어서 약간 자존감이 높아졌다.”

이번 전시 SPACETIME OF LIGHT의 제목을 정하면서는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림은 그림으로서 보여져야 하는데 제목나 설명이 곁들어짐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매몰돼 그림에서 뭔가 놓치게 될까 염려되어 한정된 연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단어보다는 중립적인 단어를 쓰려고 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은 컬러 펜화이다. 박 건축사는 단색 펜화를 그리다 단색의 한계를 넘어 풍부한 표현을 위해 캘리그래피용 컬러 잉크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조색된 잉크를 사용하지 않고, 원액의 컬러로만 작업을 해왔다. 균일한 색감을 유지하면서 레이어마다 다른 색을 쌓아 올리며 만들어내는 중색(重色)효과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색이 직접적이지 않게 인식되면서도 아래에 쌓인 색들이 어우러져 오묘한 혼합색으로 드러난다. 또한 선의 밀도만 변화를 주어 만든 그라데이션은 명확한 경계 없이 부드러운 빛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느낌도 선사한다.

작업에 주로 사용하는 잉크와 펜
작업에 주로 사용하는 잉크와 펜

“예전에는 붓으로도 그렸다. 하지만 붓은 상대적으로 우연성에 의존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반면 펜으로 그리는 것은 계획적인 작품을 구현하는데 상당히 유리하다. 작품을 준비할 때 완성단계까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곤 하는데, 그런 면에서 펜이 유용하다. 반면 단점이라면 그라데이션 같은 표현이 어려운 편인데,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 훈련이 필요하고, 그래서 획을 긋는 순간 호흡의 콘트롤이 매우 중요한 편이다.”

보통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한 계절 정도는 소요된다고 한다. 박 건축사는 반복적으로 획을 그려 넣는 작업 시간 동안은 오히려 더없이 평온함과 힐링의 시간을 만끽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선들이 균일하게 메워져 면을 이루는 과정을 상상하며 작품을 본다면 작가가 주변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무엇 하나 방해받지 않는 순간에 이르러 몰입한 순간이 시각적으로도 전해질 것이다.

박병제 건축사와 손경애 건축사뉴스 편집국장
박병제 건축사와 손경애 건축사뉴스 편집국장

박 건축사는 건축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 쉬는 시간에 건축을 하고 있다. 건축과 그림의 비중은 거의 같다고 한다.

“건축을 할 때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은 것이 건축과 미술은 다른게 아니고, 그 경계를 흐리게 하고 싶고,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거든요.”

박 건축사는 건축, 회화, 시(詩)라는 표현 방식에 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동료 이종필 건축사도 “특히 박병제 작가의 평생에 걸친 작업에 대한 생각은, 글과 건축과 그림을 늘 다르지 않다고 보고 그 경계를 흐리고 확장하는데 노력함과 동시에 예술의 근원적인 본질과 독창성, 그리고 보편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획득하고자 했고, 그걸 보란 듯이 이루어낸 보기 드문 작가이기도 합니다”라고 밝혔다.

2017-02 풍경 _Waterscape Pen and ink on paper, 66 x 44cm(박병제 作)
2017-02 풍경 _Waterscape Pen and ink on paper, 66 x 44cm(박병제 作)
(좌)2020-06 풍경 _Waterscape Pen and ink on paper, 33 x 45cm(박병제 作), (우)2018-01 전망 좋은 방 _A Room with a view Pen and ink on paper, 33 x 45cm(박병제 作)
(좌)2020-06 풍경 _Waterscape Pen and ink on paper, 33 x 45cm(박병제 作), (우)2018-01 전망 좋은 방 _A Room with a view Pen and ink on paper, 33 x 45cm(박병제 作)

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건축적인 요소들은 건축을 했기 때문에 포함시켰다기 보다는 자연만 있으면 인간의 삶의 자취나 흔적이 좀 괴리되는 느낌이라 연결고리로서 등장시켰다고 한다.

“집이라는 것이 가장 인공적인 오브제의 대표적인 형태이고, 또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그런 의미로 상징적으로 넣었다. 그리고 건축의 흔적을 될 수 있으면 안 넣으려고 했던 이유는 건축을 할 때 항상 즐겁지만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의 결과물이 나왔을 때 굉장히 기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힘들고 고단한 여정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쉴 때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쉴 때까지 건축에 대한 생각을 해야되는가?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밝고 환한 분위기가 건축 작업에도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굉장히 제약이 많은 특히 기능적인 제약이 많기 때문에 건축에서는 웬만하면 화려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최대한 단순하고 기능적이면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건축 작업에서 참았던 부분들을 보상받고 싶은 욕구에 그림 작품에서는 화려해지고 풍부해지는 것 같다. 심리적으로 좀 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박병제 건축사
박병제 건축사

“담백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 추한 것... 가지각색의 여러 가지가 섞여 있지 않나. 근데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보니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도 아름답게 느낄 때가 잘 없더라. 그래서 이 세상에 아름다운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는 것이 가장 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 순간 만큼은 행복했으면 싶고, 집에 걸어두고 봤을 때 좋은 기운을 느끼고 밝아지면 느낌을 받았으면 싶었다. 그러면서도 명랑하고 가벼운 것만이 아니라 차분하고 진중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박병제 건축사의 「SPACETIME OF LIGHT 」展은 오는 3월 4일까지 나인원 갤러리에서 진행된다. 

 

느닷없이 시련과 위기가 닥쳐올 때나, 혹독하게 춥고 긴 겨울 속에 까닭 모를 회한(悔恨)이 넘쳐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댈 때, 이어 내 유약(柔弱)함이 애증(愛憎)과 오회(悟悔)로 시달릴 때, 그때 펜 한 자루는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효용이 있다. 때로는 이처럼 세월을 주절주절 읊을 구실을 만들어주고, 때로는 상념에 잠겨 한 획 한 획 순백의 종이에 가려있던 세상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드러나게 하는 것. 그렇게 일부나마 선명히 드러날 때면, 설명할 수 없어 부대껴한 세상의 한 단면이 그렇게 뚜렷이 드러날 때면, 비로소 부유(浮遊)하던 내 영혼을 붙들어 정박(碇泊)케 한다. 세상에 굴복해 비겁해진 내 삶에 당위성도 부여해준다. 언제라도 잘만 하면 이것으로 그럴듯하게 변명하고 설명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디흰 무(無)의 여백에서 어떤 우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 아니 색조차 시공조차 없이 온 우주를 완전한 무(無)로 소멸케 할 수 있는 도구. 

그리하여 무위(無爲)로 훨훨 나는 영혼은 그 어떤 번뇌와 회의(懷疑)에도 도탈(度脫)하는 것이다. 펜은  내게 그런 것이다. 그림은 고스란히 내게 그런 것이다!  

- 작가 노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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