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제공=효형출판)
(자료제공=효형출판)

건축가의 숨결이 오롯이 스며든 우리가 몰랐던 비범한 도시들

브라티슬라바, 그단스크, 류블랴나, 힐베르쉼, 리가, 리예카, 릴-메트로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럽 도시들이다. 알고 보면 ‘비범한’ 이들 변방의 도시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유럽사의 중심에서 비껴간 빛나는 조연 도시가 갖는 서사를 음미하는 것과 더불어, 저자의 진중한 시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공간의 매력에 빠져든다. 생소한 지명만큼이나 도시가 품어내는 상징성과 이어지는 유별난 콘텐츠는 깊다.

류블랴나를 지중해의 신전으로 만들고자 했던 ‘슬로베니아의 가우디’ 요제 플레츠니크, 네덜란드 힐베르쉼에 평생을 바친 빌럼 마리누스 두독, 리예카의 여성 건축가 나다 실로비치와 아다 펠리체 로시치,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경계를 오간 릴-메트로폴의 로베르 말레 스테뱅스까지. 저자는 도시 이면에 켜켜이 쌓인 건축가들의 이야기들과 그들이 지닌 문화적 감수성과 예술적 상상력을 끄집어낸다. 어디서도 쉽게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건축가들의 건축세계와 그들의 애정이 듬뿍 담긴 공간은 새로움을 향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

책 제목으로 등장한 폴란드 그단스크는 ‘단치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전쟁의 상흔 위에 그려진 ‘아픔의 도시’다. 폐허 더미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간 이 도시는 창조가 아닌 ‘복원’에 집중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축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마중물이었다.

복원의 기본 원칙은 독일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란드의 황금 시대(17-18세기)가 낳은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뒤따랐다. 중심 거리 ‘드우가’가 대표 사례다. 거리 중앙에 자리한 19세기 부호의 집 ‘웁하겐 하우스’가 전성기 그단스크의 힘을 상징한다.

그단스크는 지금도 재건 작업이 한창이다. 모트와바강 맞은편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은 여전히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1185년부터 존재해 온 성 캐서린 성당은 여전히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어떤 벽은 훼손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화재로 약해진 구조를 보강하기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던 자리는 벽돌로 메웠다. 성당의 보존 방식은 고문헌과 그림을 뒤져가며 완벽하게 예전 모습으로 되돌리려 했던 구도심 복원 프로젝트와는 큰 차이가 난다. 원래 모습을 재현하기보다 최대한 남은 구조를 활용해 공간을 살리는 방식을 택했다. 옛 영광에만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재창조하고 복원했다면, 건축은 오히려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와 시민들은 그단스크를 톺아봤고 과거 서사를 온전하게 살려 현재를 만들고 있다.

그단스크의 이야기는 생생히 일러 준다.

“역사가 담긴 도시를 진중하게 대하며 성급하게 복원하지 말라.”

그렇다면, 다른 여섯 도시는 어떨까.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비범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힐베르쉼은 20세기 세계 건축을 이끈 네덜란드 전위 건축의 발생지였다. 백 년 전 캔틸래버 방식으로 지어진, 당대 혁신적인 건물 ‘햇빛요양원’이 있는 곳도 바로 힐베르쉼이다. 결핵 환자를 위해 지어진 이곳은 치료제의 발명과 함께 버려졌다. 그러나 1960년대 건축사학자들의 노력 덕에 재조명받고, 리모델링을 거쳐 재활원과 사무 공간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또 어떤가. 20세기 초 북유럽의 아르누보를 선도했다. 크로아티아 리예카는 아드리아해의 황금 시대를 연 항구 도시로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계로 열린 창이었다. 프라하나 비엔나에 가려진 카메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는 과거 영광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작지만 위대한’ 도시들이다.

우리가 몰랐던 유럽 이야기, 슬로베니아의 가우디를 아시나요?

진지한 도시 탐구서인 이 책에는 낯선 일곱 도시와 그 도시에 혼신의 힘을 쏟은 건축가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밑줄 치며 곱씹어볼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건 ‘슬로베니아의 가우디’로 불리는 건축가 ‘요제 플레츠니크’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류블랴나 곳곳에 새긴 건축은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큰 울림을 준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활동한 플레츠니크는 류블랴나를 전쟁으로 고통받은 슬로베니아인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자 ‘지중해의 신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도시의 중심 광장인 프레셰렌 재정비와 삼중교 프로젝트에서는 그의 소망이 빛난다. 슬로베니아 국립 대학 도서관 프로젝트는 또 어떤가? 대지진으로 파괴된 건축물의 잔해를 활용하여, 외관에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돌들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도시재생’과 ‘도서관 설립’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플레츠니크만의 특출난 디자인으로 창조해냈다.

그를 ‘슬로베니아의 가우디’라 부르는 까닭은 자신의 이상향을 담은 몇몇 건축물을 구상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플레츠니크는 류블랴나의 앞날을 미리 그려본 도시의 설계자다. 구도심 언덕 위를 지키고 있는 류블랴나성을 아크로폴리스로 삼고 성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강, 다리, 광장, 운하 등을 배치한, 수십 년 전 완성된 그의 도시계획안. 당대에는 말 그대로 혁신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2004년부터 하나씩 적용되기 시작했다. 플레츠니크의 안목 덕분인지, 마침내 2016년, 류블랴나는 ‘유럽 녹색 수도’로 선정되었다. 류블랴나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건축가 한 사람의 의지는 도시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류블랴나처럼.”

저자는 낯설면서 독특하고, 과거의 무게감에 함몰돼 지금은 주목받지 않은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을 담아 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처음 마주한 골목은 ‘설렘’을, 그 안에 담긴 건축가의 숨결은 ‘진한 여운’을, 파괴되고 짓밟혔던 과거는 ‘아픔’을, 건축을 통해 시민들의 자긍심을 찾아주려는 노력에서는 ‘배려와 애정’을 마주할 수 있다.

 

:: 고건수 ::

건축가 고건수는 소박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에 유독 관심을 둔다.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와 시골이 공존하는 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레 회색빛 도시에서 접할 수 없는 공간적 감수성이 내면에 자리잡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 감각을, 네덜란드 델프트공과대학교(TU Delft)에서 실용적이고 공학적 완성도가 높은 건축을 배웠다. 현재는 정동길에 자리한 EUS+ 건축사사무소에서 우리 주변의 평범한 공간이 건강한 풍경으로 오래 남을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하며, 다음 세대 건축가들과 함께 미래 공간을 그려보고 있다.

공간문화대상 대상(2020), 공공건축상 최우수상(2020)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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