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바뀐 이름의 도시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화성시(華城市)에는 화성(華城)이 없다. 화성은 태양계 행성인 화성(火星)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조가 만든 성곽도시로 수원시에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곳이다.

현재 화성(華城)성곽이 있는 곳은 수원시이고 고려 시대부터 수원의 읍치가 있던 곳은 화성시라 부르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알아보자.

좌-18c 수원지도, 우-19c 수원지도

사진설명 : 18c 수원지도에서 빨간색 동그라미로 된 읍(邑)이 있는 곳이 수원읍이고 이곳은 현재 융건릉이 있으며 화성시 관할이다. 19c 수원지도에서는 읍(邑)이 광교산 밑으로 현재의 화성으로 현재는 수원이다

 정조가 화성을 만들기 이전 수원의 읍치는 현재 팔달산에 있는 화성이 아니고 융건릉이 있는 곳으로 현재 화성시의 관할이다. 당시 수원의 주변은 북쪽으로 수리산을 경계로 안산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광교산을 경계로 용인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비봉산을 경계로 남양이고 남쪽으로는 오산을 경계로 진위가 있었다.

 근대에 들어 남양은 수원과 합해지고 진위는 평택에 합해져 그 이름이 쇠퇴하고 또 수원에 속해있던 오산은 시로 승격하였다.

 

 화성(華城)의 유래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곳이 화산(花山)에서 시작되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되며 중국 화(華)지방의 군주가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화규삼축(華封三祝)를 인용하면서 이곳을 화(花)에서 화(華)로 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묘 이장으로 읍치가 이전하게 되며 새 읍치에 성곽을 건축하면서 화성(華城)이고 불리기 시작한다. 정조 17년(1793)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명칭을 ‘수원유수부’라 하지 않고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라고 하면서 행정적으로 화성이 시작된다.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뜻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지만, 훗날 후손이 쉽게 추진할 수 있도록 이곳을 중국 황실과 공자(孔子) 등과 관련하여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요임금과 관계된 화(華)자의 화성(華城),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의 장안문(북문) 후한의 광무제와 관련된 낙남헌(洛南轩) 등등 화성과 행궁 시설물은 중국 황실과 연관된 이름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공자와 연관하여 공자 사당인 궐리사(闕里祠)를 크게 짓고 주변에는 공자 후손인 공(孔)씨들을 모여 살게 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중국을 선망한 것은 당시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다.

 수원을 1793년 공식적으로 화성이라 하였지만 단번에 바뀌지 않고 두 이름을 혼용하여 부르고 모든 기록에도 같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그동안 진행한 정책들이 중단되어 화성의 장용영 폐지와 수원의 특혜도 없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화성은 힘을 잃게 되고 이름도 화성보다는 수원이 더 많이 불리게 되는데 기록에도 화성유수가 아닌 수원유수라고 되어 있고 성(城)을 칭할 때는 수원성이 아닌 화성이라고 하였다.

 수원과 화성이 혼용되어 불리던 시간은 8~9년 정도이고 정조 사후에는 지역(地域)은 수원이라 하고 성(城)은 화성이라고 하여 수원의 이름이 복원되었다.

 1949년 수원군의 읍(邑)이 시(市)로 승격하여 수원시(水原市)로 독립하고 잔여구간을 가진 수원군은 화성시로 이름을 변경한다.

 수원시가 독립하면서 읍이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어서 수원이란 용어보다는 화성이란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반대로 수원시가 독립한 후 수원군(이후 화성군)은 지리적으로 수원과 남양(南陽)을 포함하고 있어 ‘수원’이란 이름이 서로 겹쳐 사용하지 못하면 ‘남양’을 사용해야 했다고 본다.

 남양은 오래된 도시이며 ‘도호부’까지 승격되었던 중요한 곳인데 수원군청사가 화성(華城) 내부에 있어서인지 남양은 외면당하고 화성군(華城郡)으로 함으로서 수원과 화성은 상대방에 뿌리를 둔 도시가 된 것이다.

수원과 화성시는 역사적으로 한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오산시도 원래 수원이었기에 이 세 도시는 지리 문화적 공동체다.

작년에 수원시가 주관한 ‘2016 정조대왕 능 행차’에 능(陵)은 없었는데 능이 화성시에 소재하고 화성시는 이 축제에 참여하지 않아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수원, 화성, 오산 세 도시의 이해가 달라 서로 행정적 통합은 못 하더라도 문화적 통합은 모두가 원하고 있어 이른 시일에 추진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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