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는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만남니다.

추사박물관
과지초당이 보이게 디자인하다.
실내초 입구
과지초당
추사 김정희

노년의 긴 귀양살이 끝에 과천으로 귀향하다

추사는 제주도 9년 살어름살이 3년만에 함경북도 북청에서 2년 모두11년의 귀향생활을 하였다. 과천 청계산 북측자락 관악산 낙조가 그의 말년을 뒷바침하는 풍광(風光)이다.

1840년, 그의 나이 쉰다섯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도 억울하게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외딴 바닷가에서 9년의 귀양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정에 있는 그의 배소는 외롭지 않았다. 멀리 육지에 있는 제자 강위가 찾아와 수발을 들었고, 제주도의 많은 선비들이 찾아들어 그에게서 학문을 익히기도 하고 글씨를 배우기도 했다.

배소에서 그는 부인의 부음을 듣고 그 슬픔을 붓으로 달랬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글씨를 썼고 많은 그림도 그렸다. 신품(神品)으로 일컬어지는 〈세한도(歲寒圖)〉도 이때 이루어졌다. 〈세한도〉는 친구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 가져가 그곳 명가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호는 선비의 표상이요 멋일진대 그는 굳이 한두 개의 호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시도 지었다. 인마(人馬)에 짓밟히며 제주도의 들판에 핀 수선화를 두고 노래하기도 했다.

9년 만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인도 없는 쓸쓸한 집에서 3년도 채 지내기 전에 친구 권돈인이 유배가게 되자 그에게 또다시 혐의가 씌워졌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북쪽 땅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 북청의 배소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제자 강위가 다시 찾아왔고 그곳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 제주도의 수선화와 북청의 돌화살, 이것은 분명 김정희 자신을 표상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2년 만에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예순 여덟이었다.

불행을 예술로 승화하다

그는 아버지가 지어놓은 과천 여막으로 들어갔다. 관악산 아래 여막에서 조용히 일생을 돌아보며 불경을 읽기도 하고 참선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의 여막이 바로 정토였고, 자신이 바로 부처였다 이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이는 현판 글씨가 전해진다. 그가 용산변 강마을에 우거할 때 썼다고 한다.

사서루편액

추사체의 조형미를 대표한 현판 글씨 가운데 서(書)에 본디 없는 ‘삐침’을 붙여 놓았다.그의 글씨는 무슨 체를 가릴 것 없이 수도 없이 남겼으며 때로는 현판에 새겨져 걸려 있기도 한다.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는 평판을 듣는다. 그런 탓인지 위작이 널려 있다. 위작의 범람은 역설적으로 말해 그의 글씨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는 뜻이다.

그는 한철을 봉은사에서 보낸 뒤 10월 과천의 여막으로 돌아와 조용히 세상을 마쳤다. 만약 그에게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그는 번진 속에서 그러저러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의 불행이 곧 예술의 승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이화의 인물학국사에서 일부발취)

추사의 자료는 일본학자 추사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 집과 대학연구실에 보관하다가 대동아전쟁시 폭격으로 많이 소실되고 남은 것을 아들인 아키나오가  과천시에 기증하므로 師父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큰박물관은 수장고에 주로 보관되지만 시립박물관은 계속전시 가능해서 작지만 추사전문박물관에 마끼게된 것이 아키나오의 뜻이다.

과천시 추사로78(주암동)일대에 2055m2부지에 한옥2동(66m2)규모로 지어졌다. 박물관은 건축비115억원, 총212억원을 들여 개관한 추사박물관에는 현재 추사관련자료 1만50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담인력은 박물관장 학예사 2명등 모두6명이 추사박물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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