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건축가들
- 828km 순례길에서 건축의 본질과 인간의 의미를 묻다
“건축사는 공간을 설계하지만, 결국 그 공간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건축사가 왜 순례길을 걷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여정은, 스페인 북부의 카미노 순례길 828km를 따라 걸은 45일간의 기록을 담았다.
신만석 건축사는 “건축은 걸으면서 체험되는 예술”이라는 고전적 명제를 순례길 위에서 다시 확인했다. 건축 현장의 빠른 설계와 시공에 익숙해져 있던 저자에게 느린 순례 여정은 ‘속도가 아닌 시간’의 개념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과 도시, 신앙과 역사가 한데 어우러지는 카미노의 오래된 길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고 지내던 건축사로서의 설렘과 호기심을 재차 불러온다. 도시와 건축·사람과 시간이 겹쳐 쌓인 장소의 의미를 현장에서 복원해내는 인문 건축 기행서다.
스페인 북부의 카미노를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신만석 건축사는 ‘공간이 품은 시간’과 ‘사람이 남긴 흔적’을 읽는다. 바스크의 문턱 엉다이·이룬에서 출발해 산 세바스티안의 라 콘차, 빌바오와 구겐하임, 게르니카의 침묵의 광장과 ‘게르니카의 나무’, 대서양을 따라 이어지는 항구 도시들의 리듬을 건축사의 눈으로 읽고, 순례자의 발로 이해한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기록한 사진과 함께 펼쳐지는 인문적인 통찰은 사유의 지평을 한층 확장시킨다.
라 콘차의 완만한 곡선은 자연·공학·도시의 합의가 만든 ‘머무를 수 있는 아름다움’이고, 미라마르 궁전은 왕가의 별장에서 시민의 공원으로 변모한 공간의 민주화를 보여준다. 밤이면 등대처럼 빛나는 쿠르살 회관은 ‘두 개의 바위’라는 지형의 은유로 장소의 기억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사례다. 반대로 게르니카에서는 부재의 건축이 말을 건다. 과장된 기념비 대신 낮은 벤치와 비워둔 여백이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며, ‘게르니카의 나무’와 의회의 축은 “건물보다 나무가 중심이 되는” 도시의 위계를 일깨운다. 같은 장소라도 걸음의 속도가 바뀌면 의미의 결도 달라진다.
이 책은 전문서와 여행기 사이의 기분 좋은 중간지대에 있다. ‘건축가의 시선’ 코너에서 쿠르살의 외피와 음향 비례, 산 세바스티안 구시가지의 밀도·보행 리듬을 차분히 풀어내는 한편, 알베르게에서 나눈 핀초스 한 접시, 파사이아 만을 건너는 짧은 배편, 골목에서 만난 현지인의 인사처럼 웃음이 스며든 장면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전문적이되 어렵지 않고, 인문적이되 무겁지 않다. 무엇보다 저자는 “경계를 허무는 법”을 삶의 태도로 제안한다. 대지 경계·실내외 경계를 설계하던 습관을 내려놓고, 물성·레벨·빛과 바람으로 경계를 ‘완화’하는 도시의 장치를 길 위에서 발견한다.
후반부에는 마드리드·톨레도·발렌시아·바르셀로나까지 여정을 확장해 ‘현대의 심장과 역사의 영혼’이 만나는 장면, 칼라트라바의 물과 빛, 가우디의 곡선이 도시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살핀다.
우리는 도시의 미학은 사람이 머무는 시간에서 탄생하고, 좋은 건축은 누구의 발걸음도 환대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 신만석 ::
신만석(申萬錫)은 (주)건축사사무소 광장의 회장으로서 설계, CM, 안전진단 분야의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과 도시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왔다. 경상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명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졸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근무하다 1995년 광장건축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건축사이자 건축시공기술사로서 1999년부터 명지대학교와 인천대학교에서 15년간 건축학도를 위한 강의를 이어왔으며, 대한건축사협회 이사, 경기도건축사회 부회장 겸 경기건축문화제 집행위원장, 경기도건축사회 감사, 용인시 건축사회 회장, 용인시 건축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건축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2018년), 국가건축위원회 위원장 표창(2016년), 국토교통부장관 표창(2003년), 경기도지사 표창(2019년)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