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와 비관보다는 건강한 변화를

2024-04-22     김유홍(건축사사무소 봄 건축연구소)
김유홍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봄 건축연구소)

작년 말 경기도 파주시의 ‘문산보건지소 및 노인복지관 복합센터 설계공모’ (이하 문산보건지소)에 참가했고 결과는 2등이었다. 공모전의 경험이 미천하지만 이런 공모전은 처음이었다. 청탁이나 로비에 대한 고발이냐고? 아니다. 다행히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이다. 공모전 결과가 발표되고 다음 날, 나는 SNS에 “…기분 좋은 2등, 1등에게 축하의 박수를…”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올렸다.

문산보건지소 공모전에 대하여 마치 유튜브에서 10분 요약으로 영화 소개를 하듯 간단하게 몇 장면을 소개해보려 한다. 모두 바쁜 생업이기에 내가 참여하지 않은, 혹은 참여했더라도 당선되지도 않은 공모전에 관심 갖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느 지역 하나의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조와 비관이 내면 깊숙이 퍼져 있는 요즘 꼭 하고 싶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장면, 문산보건지소의 심사(물론 지금도 유튜브로 생중계 했던 심사를 볼 수 있다)는 간단한 상견례 이후 제일 먼저 심사위원 사전 접촉한 업체를 실격 처리하면서 시작했다. 나에게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전 접촉에 대한 진행자의 설명이 채 끝나기 전 심사위원 한 분이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있는데 조금 낭만적으로 얘기하자면 어떤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싶다. 공모전을 참가하며 매 번 제출하는 사전 접촉 금지 확인서나 심사위원 기피 신청 등의 서류가 그저 형식적이고 죽어 있는 문서가 아니라 살아서 작동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관행과 관습 그 게 뭔데, 라고 말하듯 하나의 제도가 있고 그 제도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현장답사였는데, 심사 당일 본격적인 심사 과정에 앞서 심사위원 전원이 함께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얼핏 사소해 보여도 탁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공모전의 경우 심사위원들이 개별적으로 현장을 가거나 현장을 보지 않은 채 심사에 임하기 일쑤다. 설계의 과정에서 대지와 주변 현황에 대한 분석이 가장 먼지이지만 설계가 구체화되면서 현장에 대해 점점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계획안에 매달린 참가자들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공모전의 태생적인 취약점인데, 심사위원 전원이 함께 현장을 방문하고 주최 측의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며 현장을 둘러보고 관점을 공유하는 것은 훌륭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면이자 가장 좋았던 점은 심사과정에서의 토론이었는데 공모전을 생중계하는 이유이자 취지를 충족하는 내용의 심사였다. 생중계가 무색하게 아무런 토론 없이 채점이나 투표로만 진행되곤 하는 공모전과 비교해보면 진지하고 충실한 토론은 좋은 참가작을 견인하는 중요한 공모전의 요건이다. 사실 토론과 크리틱이야말로 우리가 학교에서부터 건축을 배워온 방식이고 건축을 공적영역과 학문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세심한 토론은 그 결과를 비록 동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생중계를 지켜보며 두 달 가까이 열심히 준비한 참가자 중 한명으로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노력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 참가자들의 설계의도를 찾아내려하고 이해하려 애쓰던 그날의 심사위원들, 패널의 아래쪽에 있는 도면을 살피려고 허리를 숙일 때 카메라 쪽으로 불쪽 내밀어졌던 심사위원들의 아름다운 엉덩이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 보니 시청자들은 패널의 내용을 볼 수 없었다는 것과 이동하며 심사할 때 심사위원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파주시가 주관하는 공모전의 배경을 모르고 논평할 능력도 없다. 총괄건축가의 역할이 컸을 테고, 시 차원에서의 의지와 기획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마실와이드의 관리, 훌륭한 심사위원들의 역할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총괄건축가의 헌신적인 역할로 좋은 공모전과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

로비와 청탁은 여전히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청탁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건축사라 부르고 교수라 불리는 우리들 중 누구이다. 우리들 중 누구라는 말은 설령 나는 아니어도 나와 가깝거나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좋은 사례가 더 많아져 평균의 인식과 기준이 높아지는 쪽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회의 악이든 암세포든 발본색원보다는 건강함과 건강한 세포를 더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힘들고 혼탁한 세상이고 세상은 언제나 힘들고 혼탁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 건강해지면 더 씩씩해지고 더 좋은 건축 환경을 - 제도이든 실제 삶의 환경이든 -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 스스로가 조금 더 자긍심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