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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설계의 기본은 휴머니즘 - ③시대의 선구자로서의 건축사

시대의 선구자로서의 건축사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건축융합학부 이을규 교수

 

시대를 선도한 건축사의 역할

건축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건축은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히틀러의 파쇼시대나 북한의 1인 독재시대의 건축은 선전선동의 도구로써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해서 프로파건더 건축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정신을 바람직하게 표현하는 건축물의 경우 그 나라나 그 도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근현대건축의 서두로 볼 수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이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이 그 시대의 정신을 바람직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1 빌라사보아(사진=이을규)
그림2 빌라사보아(사진=이을규)
그림3 롱샹 교회(사진=이을규)
그림4 롱샹 교회(사진=이을규)

중세건축에서 근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근대건축 5원칙의 사보아 저택과 국제주의 건축의 시그램 빌딩은 중세에서 근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획기적인 건축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용은 누구나 건축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에펠탑과 문화강국의 프랑스

나는 이들 건축가의 시대 이전의 건축(탑은 구조물이지만 에펠탑은 탑안에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으므로 건축이라고도 볼 수 있음)인 에펠탑에 대한 내용을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에펠탑은 에펠이 설계하여 건조한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에펠탑을 꼭 세워야 했던 프랑스의 그 시대적인 배경은 간과하고 있다.

이 설계에 작업한 사람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에펠인데 이 사람의 전공은 토목공학자였고, 에펠사무소가 공모안을 제출한 것이고 실질적인 작업은 에펠사무소 소속의 건축가 에밀 누기에, 모리스 쾨클랭 그리고 스테펭 소베스트르의 3명의 건축가가 직접적으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외 당대의 프랑스 과학자, 공학자, 수학자 72명이 공동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왜 이런 작업을 하였을까? 물론 프랑스 혁명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세계 박람회인, 1889년 만국 박람회의 입구로써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림5 에펠탑(사진=이을규)
그림6 에펠탑(사진=이을규)

그 당시의 만국박람회는 프랑스 자존심의 표현이였다. 1889년 전후의 프랑스는 잦은 전쟁에서 번번히 패해왔던 터라 국내외적으로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간단히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지금의 독일인 프로이센과 여러 가지 원인으로 7월 19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유명한 재상인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임을 주장하면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전쟁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괴멸시켰다. 그리고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를 독일의 황제로 선언했다. 프랑스는 1871년 2월 26일에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프랑스어 수업을 마지막으로 하는 내용의 알퐁스도데의 마지막수업이다.(이는 실제로의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이 지역은 독일어를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다고 함) 비스마르크는 배상금을 갚을 능력이 한동안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프로이센군을 배상금을 명목으로 계속 독일군을 주둔시켜서 프랑스를 독일영토로 삼고자 하였으나, 프랑스는 거대금액인 배상금 50억 프랑을 자존심 상한 프랑스 국민들이 기부금을 내어서 3개월에 다 갚아버린다. 그리고 난 후 프랑스는 국내외적으로 실추된 자존심회복을 위해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다시 대내외적인 이미지 쇄신을 회복하려는 생각이였다. 여기서 만국박람회의 상징물이 필요하여 탑의 설계를 공모하게 된다. 이에 에펠이 철로 만든 탑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림7 라데팡스(사진=이을규)
그림8 퐁피두센터(사진=이을규)

그리고 이제는 무력에 의한 국력경쟁을 하기보다는 기술과 예술의 문화컨텐츠로써 국력을 기르고자 국가지향 비전을 내세웠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역사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그때 프랑스의 국가 비전을 바꿔서 설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화 컨텐츠가 강한 프랑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비전을 바꿀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인가. 아마 국민들의 마음을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함께 그 지향점을 향해 같이 갈 수 있도록 한 국가의 리더와 정치가가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견에 동의한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근본적인 요인일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시각적인 상징물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에밀 누기에, 모리스 쾨클랭, 그리고 스테펭 소베스트르의 3명의 건축가가 이루어내게 된다.

빌바오와 구겐하임미술관

그 연장선에서 시대적인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들고 싶다. 빌바오는 1970년대까지 철강과 조선산업이 번성한 도시였으나 그 후 도시가 쇠퇴와 쇠퇴를 거듭하던 차에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 빌바오의 시민들이 선택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빌바오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난 이 도시는 인구 40만 명 정도의 도시이지만 관광객이 1년에 100만 명 정도 찾아오는 도시로써 관광수입으로 수 조원의 수익을 얻는 도시로 거듭났다.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라는 랜드마크가 그 시작점이 되었던 것이다.

2차 산업의 종말을 고하던 침체된 공업도시에서 문화 컨텐츠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 구체적인 상징화, 형상화 작업을 맡게된 사람이 건축가 프랑크 게리였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빌바오는 결과적으로 다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구겐하임은 1997년 개관 이후 현재까지 방문객 수는 연 40~50만 명 수준으로 겨우 운영되리라고 예상한 목표를 크게 뛰어 넘어 매년 1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 중 외국인과 내국인의 방문 비율은 약 7대 3으로 미술관 방문에 그치지 않고 지역 내 소비를 유발하며 ‘문화산업’으로 도시성장을 이끄는 이른바 ‘구겐하임 효과(Guggenheim effect)’를 거두게 되었다.

최근에는 빌바오에 크루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이스(MICE) 산업의 요충지로 비즈니스 관광객도 찾기 시작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빌바오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사용하는 지출 비용은 총 5억 3800만 유로(약 7100억원)로, 투자비용의 60배 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한 입장료 등에 포함되는 세금은 연간 7300만 유로(약 963억원)이며 지역 내 약 1만 개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그림9 구겐하임미술관(사진=이을규)
그림10 구겐하임미술관(사진=이을규)

정선과 카지노

우리나라는 침체된 도시의 새로운 도시재생 전략을 획기적으로 바꾼 지역을 예를 들면 정선 탄광촌을 들 수 있다. 광공업으로 70년대의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된 산업의 기수로 불렸던 탄광촌 지역이 카지노산업의 메카로 떠 올랐다. 빌바오가 도시재생의 전략을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문화」를 내세웠다면, 정선지역은 카지노로 대표되는 「유흥과 도박」을 전면에 내세웠다. 카지노를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하면 유흥이요, 과하게 되면 도박이 되는 것이다. 카지노가 건립되고 한참 후에 도시재생의 현장을 찾게 된 나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카지노가 있는 작은 마을에 길가에 버려진 고급 승용차가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에 빼곡이 주차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카지노 앞의 마을에는 전당포가 약간 과장하면 한 집 건너 있는 듯 했다. 재미삼아 카지노에 들렀던 사람들이 자기가 타고 온 고급 승용차까지 전당포에 넘기고 그 돈 마자 카지노로 날려버린 사람들의 수의 일부분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탄광촌 거리는 강원랜드가 들어서고 재생사업의 막대한 지원금이 투자되어도 기존 마을의 전경은 개선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도시재생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사업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인생이 파탄난 흔적들만 가득한 거리였다.

그림11 강원랜드 입구전경(사진=이을규)
그림12 탄광촌 거리 전경(사진=이을규)

이와 같은 도시재생의 사업의 결정권은 건축사의 업무와 직접적인 관계는 적다. 그러나 최소한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는 있는 업무이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미칠 수는 있을 것이다. 건축은 여러 대안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도시재생의 사업 타당성에 대한 가장 관계가 깊은 분야가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된 사례는 상기에서 언급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프랑크 게리가 사업의 승패를 가르는 키맨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도시재생 차원은 아니고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특수학교인 일원에 건립된 밀알학교가 있다. 이 경우는 지역차원의 변화를 이끌어 낸 사례로 예를 들고 싶다.

이 밀알학교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이다. 원래 남서울교회가 교회를 크게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교회를 신축하는 대신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짓는 방향으로 계획이 바뀌어져서, 밀알학교가 평일은 특수학교로 이용되고, 일요일은 체육관은 교회의 주 예배공간으로, 교실은 아동들의 주일학교로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건물 사용의 구체적인 공간이용의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음악홀부터 미술 전시관, 베이커리, 카페의 공간을 계획하여 지역주민도 이용할 수 있는 복합 문화 단지로 설계되었다. 한 건물의 설계이지만 장애인과 주민과의 공생을 선언한 상징이 되었다.

건축사의 활동의 장을 넓힌 건축사

그리고 지역재생과 사회운동가의 역할을 하는 건축사도 있다. 화산화티와 사무엘막비와 루럴스튜디오가 그렇다. 이들 건축사는 건축을 통하여 가난한 지역의 환경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한 건축사다.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운동은 지방자치제가 공공건축물은 예술성을 우선시하여 건립하여 후세에도 사람들이 건축물을 감상하러 올 가치가 있는 공공건축물을 짓도록 건축사의 의견을 최우선적으로 반영하도록 행정시스템이 뒷받침하도록 되어 있다.

1990년부터 시작한 아트폴리스 작품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올해로 112작품이 설계가 완성되었거나 설계 중에 있다. 올해로 30년째 계속된다. 우리도 이러한 건축사의 위상을 높힐 수 있는 시스템이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라고 못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대한건축사협회가 우리 모두 힘을 합한다면.

그림13 소방서(사진=이을규)
그림14 야츠시로미술관(사진=이을규)
그림15 구마모토경찰서(사진=이을규)

건축사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독려하며...

국내의 마을만들기 사업이나 중심지활성화 사업, 새뜰 사업 등은 최근 농촌재생,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농림부, 국토부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이들 사업은 지역을 재생하는 지역마스터플랜과 건축설계가 동시에 필요한 사업이지만 건축사들의 참여가 저조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이러한 사업이 많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책임이 중한 건축사의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이 시대는 보다 다양한 분야와 같이 지역계획을 세워가야 하는 분야가 점점 많아 진다. 이제 개별단위 건축의 설계에서 도시나 지역전체를 계획해 나가는 건축사를 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안성에서 안성맞춤 마을대학을 9년째 진행하고 있다. 이는 안성시민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계획해 나가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을 위해서 기초적인 지식을 6회, 지역계획, 건축, 조경 등의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지역주민과 전문가가 4~5회의 워크숍을 통해서 자기 마을을 직접 계획해 나간다. 이 작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잠재능력이 높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건축가의 전문가적인 지식을 조금만 더해 준다면 지역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인 공동체 의식을 높일 수 있어서 삶의 질이 높아 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배 건축사들의 입지를 넓혀주자

이제 건축사들은 보다 넓은 역할을 생각하면 행동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건축학전공 과정은 5년제가 자리잡고 있다. 다른 전공보다 전공학점은 2~3배 이상 수료하고 있어서 더 넓게 배우고 더 깊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건축사의 역할이나 업무도 더 넓고 더 깊게 넓혀가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타 분야와 더 넓게 연계하여 작업하는 건축사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과목을 수강하고도 실제 사회에 나가서 사용되는 전공영역을 보면 너무 좁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소규모 설계사무소가 하는 대부분의 건물 단위의 작은 프로젝트의 지식은 2~3년의 전공과목 지식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5년 동안의 방대한 전공지식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지며 그 동안의 시간과 노력의 결과를 사회 공헌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기성 건축사의 새로운 용기있는 시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프로필] 이을규 교수 

•현 국립 한경대학교 건축학부 건축학전공 교수

•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동경대 대학원 연구과 건축학 박사

 

 

김미형 기자  mokj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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