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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우리의 집 - 11. 왜 집을 짓는가?

 

 

 

신동규 <경기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건축학박사, 건축사>

 

 

왜 집을 짓는가?

최근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고 적지 않게 놀랐다. 지금까지 이사한 횟수가 무려 18회이고, 주소를 적은 분량이 3쪽이나 되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고향집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과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집은 서울 도심에서 시작하여 점차 집세가 싼 외곽지역으로 옮겨가다가 결국 경기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결혼하기 전에는 매년 한 차례씩은 이사한 것 같다. 결혼한 후에도 전세살이는 한동안 계속되어 여러 차례 이사 끝에 겨우 집을 장만하였고 그 집에서 16년을 살았다. 생애 처음 당첨된 지금의 아파트에 입주할 때 가족들은 새집으로 오지 않고 처음 산 그 집에서 계속해서 살기를 원해서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비록 이사한 거리가 두어 블록에 지나지 않는 같은 마을이었지만 말이다. 이렇듯이 집은 나에게 눈물겨운 투쟁의 산물이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아닌 그때그때 주머니 속 돈에 맞추어 집의 크기와 마을을 정해서 해마다 이사해야하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이런 내 집 마련의 역사는 한국의 현대화와 도시화 과정을 거친 세대들에게 공통된 이야깃거리일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잠자리를 제공하고 가족의 삶을 유지하는 보금자리일까? 혹은 자기의 개성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일까? 또는 돈을 벌기 위한 투자의 대상일까? 아니면 자식에게 가까운 통학과 좋은 학교를 배정받아 주기 위한 눈물겨운 자식 사랑의 산물일까?

우리가 집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슷하다. 폴 앙드뢰는 “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마치 딱딱한 피부 껍질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폴 앙드뢰 지음, 정미애 옮김, 솔 출판사, 2011)

즉 자신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는 “나에게 집은 최초의 보호막이었고,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모습대로 살게 해주었으며, 기억을 형성시켜주었던 공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집은 생김새가 아닌 일상의 사건과 느낌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아빠, 엄마, 누나, 동생 같은 가족과 친근한 이웃이 아웅다웅 서로 엉키어 살아가던 일상의 사건과 그때의 감정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의 집에 대한 느낌은 내가 아끼는 물건, 친근한 소리, 냄새, 감촉,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안락함, 편안함, 안전함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장소로 기억된다. 만약 집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 곳은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집이 아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집(home)과 주택(house)을 구분하여 정의한다. 즉 주택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물리적인 형태를 의미하고, 집은 자신의 마음이 사는 곳이란 의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고용된 사람의 죽음(The Death Of The Hired Man)에서 “ 집(Home)은 우리가 그 곳에 가야할 때 그 장소이며, 그 곳은 우리를 받아드린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집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드리는 곳이며, 어딘가로 집을 떠났다가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집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우리의 전래 동요인 “달아달아 밝은 달아” 라는 노래에 대한 이어령의 해석을 빌려보자. 이 동요에서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밝혔으니”라는 구절은 집을 짓는 재료를 말하고 있다. 즉 달 속에서 곧고 무성하게 자란 귀한 계수나무를 집의 재료로 사용하겠다는 말이며, 다음 구절의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는 계수나무를 옥과 금으로 만든 도끼 즉 아주 귀하고 좋은 연장으로 찍어내고 정성을 다해 다듬어 집을 짓겠다는 의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좋은 목재와 귀한 연장으로 정성을 다해 짓는 집은 정작 ‘초가삼간’에 불과하다. 초가삼간은 가장 작은 살림집으로 부엌과 방이 달랑 두 개뿐인 그야말로 작은 초가집이다. 그러나 그 집을 짓는 목적은 놀랍게도 ‘양친부모를 모셔다가 천년만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염원뿐이다. 요즘 젊은이 중에 집을 왜 사야하는지 물으면, 부모님 모시고 행복하게 살려고 산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도 같은 맥락이 느껴진다. 이 시의“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란 구절의 뜰은 앞뜰을 의미하며, 금모래가 있는 곳은 강변이므로 앞에는 강이 바라다 보인다.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뒤뜰이 산에 접해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앞뜰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아늑하고 햇볕이 따듯한 명당이 아련하게 그려지는 서정시이다. 그러나 강변에 사는 목적은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로 엄마와 누나와의 행복한 삶을 위한 가족애가 바탕에 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집에 관한 정서에는 늘 가족이 있다. 그 가족이 늙은 노인이든, 병든 가족이든 보살피고 보듬어야 할 나의 일부로 인식된다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앞의 동요들은 집을 지을 때의 첫째 목적은 신분 과시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지나치지 않은 겸손과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 보면 사회적 신분에 따라 모든 건축물의 규모와 색채 및 재료를 규제한 내용이 나온다. 또한 조선시대의 제도와 법률을 집대성한 경국대전에서도 신분에 따른 건축규제가 보인다. 집에 대한 규제의 내용을 보면 그 목적이 신분을 가르고 서민의 건축물을 규제하려는 의도보다는 신분이 높고 잘사는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규모와 장식을 억제하고 사치를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두 번째 강조점은 가족애 즉 가족의 화합과 행복이 우선이라는 영구불변의 가치이다. 집을 지을 때에는 가족의 시작, 성장, 쇠퇴가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며, 가족의 행복한 삶터가 되도록 배려해야만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삶에서 가족이라는 분리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를 상실해가는 우리에게 집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고 바르게 설정하는 것을 모든 집짓기의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는 늘 가족과 집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도 사람이 살아갈 미래에도 가족과 집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집에서 나고, 자라고, 짝을 만나고, 자식을 키워낸다. 집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하는 공간이기도 하거니와 자리에 누워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영원이 잠들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병원에서 나고, 학교에서 크며, 예식장에서 짝을 만나고, 병원에서 죽기를 기다린다. 현대인의 삶 속에 내 마음이 머무는 우리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집은 인간 최초의 보호막이었고, 꿈을 저버리지 않고 키워가는 곳이고, 우리의 어린 기억이 형성되는 곳이다. 사람이 가진 것 중에 이렇게 온몸으로 기억되고 눈물 나게 그리운 대상이 또 있을까? 집을 지을 때에는 법규, 투자가치, 공간배치, 형태와 같은 잡동사니 들은 제쳐두고 그 가족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활할 때 행복한지를 묻는 것이 집짓기의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돈을 위해 밤낮으로 지어대던 주택건설의 역사를 가족이 생사고락을 같이할 집짓기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 시작을 통해 희미해져가는 가족의 소중함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게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인영 기자  mybestlif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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