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예공간예찬(陰翳空間礼讚)

책꽂이 속 먼지 쌓인 책 안에 숨겨져 있던 학창시절의 단체사진이나 옛 첫사랑의 사진을 혼자 발견하였을 때, 그 순간 시간은 멈추고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그때 그시절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경험을 한 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과거로부터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마치 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경우도 있다. 

기자는 어느 날 먼지 쌓인 기억 속에서 발견하게 된 한권의 책을 보자마자 심장이 뛰었다. 이제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서점이나 주문만 하면 하루만에 배달되는 그곳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한 권의 책을 다시 만나기 위해 중고서점을 다 뒤지기 시작하였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던 젊은 시절 지금은 핸드폰이 빼앗은 한 손에 한동안 늘 가지고 다니며 건축공간과 사랑에 빠지게 하였던 그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니 내가 만나러 갔다.

 

“음예공간예찬 (陰翳空間礼讚) ”- 타니자끼 준이찌로 지음/김지견 옮김/조인숙엮음

음예공간예찬(타니자끼 준이찌로 지음/도서출판 발언)

이 책은 건축을 전혀 모르는 저자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공간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내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가듯 우리 마음 속을 물들인다. 음예(陰翳, Shadow)는 ‘그늘도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럼한 모습’을 말한다. 저자는 일본의 독특한 풍토와 문화를 외면한 채, 물밀 듯이 밀려드는 서구의 외래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과를 담담하게 감상적인 문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부드럽고 여성적인 문체 뒤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를 향해 비판으로 꾸짖고 있다. 길지 않은 글 속에서 건축을 시작으로 드라마, 종이와 도자기, 음식, 여성, 그리고 어둠과 밝음에 이르기까지 생활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걸쳐 “더 부드럽고 조용하며 더 음울한 미적 전통을 예찬하며 밝지만 난한 서양기술의 산물에 의하여 도전받는 것에 대한 고통(음예예찬 영문판 E.라이샤우워의 글)”을 말하고 있다.

기자는 책을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저자가 얼마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애정이 있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만지고 있는 건축의 공간에 얼마만큼 애정이 있는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기준만으로 공간을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되었다.

첨단의 지능형 건물과 초고속 정보통신의 기술이 지배하는 현대건축의 시대에 어쩌면 음예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하며 말 그대로 어느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처럼 느껴진다. 현대 건축물은 외관은 자기를 뽐내듯 눈부시게 화려하며 내부는 쾌적하고 편리한 시스템으로 잘 갖추어진 공간으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기자는 옛 것을 돌아보자는 식상한 말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잊혀져가는 것 속에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과학기술과 발전된 서구의 문화를 통해 어떠한 결점도 없이 완벽할 것만 같은 시스템이 갖추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건과 사고는 발생하고 사람과의 갈등은 더욱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우수한 문명에 봉착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대신에 과거 수천 년 이래 발전해 온 진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고장이나 불편이 발생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제는 직접 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지만 중고서점에서 조금의 노력을 들이거나, 동일 저자(타니자끼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라는 산문집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문구도 이제는 철이 지나 빛이 바랜 포스터처럼 그 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겨져 있는 듯하다.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 남은 기억처럼 이 가을 한편의 수필을 통해 본래의 뜻과는 달리 내팽개쳐져 버리고 잊혀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짚어 볼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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