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석군 같은 대농의 뿌리가 있고, 예술가를 길러내다

 

정왕역은 비와 더위를 피해 버스를 탈 수 있다

시흥시의 자연환경은 대부분이 200m 내외의 구릉지와 침식저지대로 이루어져있다. 수암봉(395m), 소래산(299m) 등의 산이 동쪽 남쪽 북쪽의 시 경계에 따라 솟아 있으며, 서쪽은 경기만에 배꼽같이 접해 있다.

경기도 중서부쪽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수도권의 인구와 공업을 분담하는 침상(沈床)도시이자, 밀물 때 침수지였으나 간척으로 공업지구를 만들어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서해안 경기만에 인접해 있는 시로 면적은 131.67m2이다.

시흥시는 시흥(詩興: 시를 짓고 싶은 마음)같이 大也 계수 신천 浦 米山 梅花 果林 화정리 조남 物旺 君子 月串리 正汪 등 아름다운 동명(洞名)을 가지고 있다.

시흥시 북측 소래포구에서 촬영

정왕동 오이도의 조개더미에서는 우람해 보이는 빗살무니 토기가 발굴되었고, 목감동과 조남동에는 고인돌이 무리지어 남아 있다. 대개 이런 지역은 수렵이 용이하고, 풍광이 좋은 곳에 건축되어 있다.

군자봉에서는 삼국시대 쌓은 평산형(平山形) 산성지를 볼 수 있는데 주변에 평산(平山) 신씨들이 살고 있다. 불교 유적으로는 수암봉 기슭에 수암사지 봉천사가 있다.

소래포구로 들어오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소래산마애보살입상(높이 14m, 線刻(선각)된 한국 최대의 석불조각)이 보여 들어오는 만선의 배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고구려를 떠난 비류는 彌鄒忽(미추홀)에 터를 잡았으나 땅이 많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었다. 《동국여지승람》

소래철교에서 본 시흥시

상기 기록은 승자의 기록으로 터 잡는 지식과 기술을 너무 과소평가 한 내용으로 보인다.

소위, 미숫골‘지역은 습하고 땅이 질벅하였으며, 서북풍이 강하여 겨울에 몹시 춥고, 공기 중 염분이 많아 철기에 녹이 심하게 나고, 피부반응도 불쾌하였다. 또한 물이 짜서 식수해결이 어렵고 당시 신기술인 농경사회 도입이 어려웠다.

또한, 큰 산이 없어 수렵이 약하여 오이도 주변에서 어패류에 의존했으나 수도방어에 필요한 큰 산이나 큰 강이나 한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륙으로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삼성산 자락 같은 곳에서 국가를 지휘통솔 했을 것이다.

미추홀은 현재 인천광역시 시흥시 일대로 비정(比定)된다. 부평권을 포괄하는 현재 인천광역시와는 달리 예전의 인천 지역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부와 시흥시(始興市) 일부를 관할하였다. 현 소래포구 물골 좌우측을 말한다.

시흥의 넓은 벌

'매소홀'(買召忽)로 기록되어 있는데 彌鄒忽(미추홀)과 같은 표기로 "미숫골" 로 읽을 수 있다. ‘맷골’, 즉 ‘거친 들의 고장’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시흥시는 고대(백제초기)에는 바닷물이 많은 지역을 감싸고 있었다고 본다. 소위 이 시대에 말하는 미추홀 역시 바닷물이 많은 섬 또는 바닷물이 닿는 내륙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안양은 백제초기 원형 집터에서 온돌구조가 발굴되었고 부엌은 서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시흥시는 큰 벌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고대에는 큰 벌이 황산벌 같이 전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세계 제2의 조수간만차이로 (평균6.9m) 하루두 번씩 있는 만조시가 아니면 비어수도(飛魚水道) 좁다란 물길을 따라 한줄 씩의 함선출입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큰 물골이 있어 소래산 입구까지 배가 다녔을 것이다.

바다를 항해할 때 산을 기준하고 여기에 고목이 있으면 중요한 항해 목표가 된다. 바다물골입구에서 보면 멀리 삼성산, 관악산, 수리산이 보인다. 백제 이주민들이 산을 향해 계곡을 들어 왔다고 본다.

당나라 소정방도 현 소래교두보(소래포구 물골)로 상륙하여 나당연합군으로 활동하여 소래산이란 지명이 나온다.

임진왜란 시 하연의 소산재가 타버리는 일도 있었다.

1877년 일본이 서해안 개항지를 물색하자, 1879년 장도포대지를 만드니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보는 곳이다.

여류화가 나혜석부친 나기정(1909.3.22. 재임명 1910.10.1)은 대한제국시, 강점기시 시흥군수를 2번이나 했다. 나혜석은 시흥군 안양리 67번지 농막에서 마지막으로 체류하였다.

1914년 시작한 시흥군은 군청이 영등포에 있다가 영등포와 한강남측 접경지역(현6개구)을 서울에 내준다.

중일전쟁을 준비코자 수인선을 부설하고 내륙의 쌀과 소금 등을 인천으로 가져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까지 제염업을 부업으로 여겨 바닷물을 직접 가마솥에 넣고 끊이는 전오제염법을 주로 행하였다. 당시 소금생산량은 15만 톤 정도라고 전해지며 절대량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대한제국은 최초로 인천의 주안지역에 천일제염 염전을 조성하고 소금 생산 방법이 근대화 된다. 이후 인천 시흥지역에 많은 천일염전이 생겨나고 국내 소금생산의 30%를 차지하게 된다. 소금의 종류는 재제염(再製鹽), 전오염(煎熬鹽: 달이고 복은소금), 분쇄세척염(洗滌鹽), 부산염(副産鹽), 민영천일염이었다.

협괘용기관차 수인선용

신현순(申鉉舜1895-1969)은 시흥최초의 운수업자로, 본관은(平山)으로 부천군 소래면 금이동 8통6호(현시흥시금이동462)에서 출생하였다. 포드8인승소사(부천)소신여객회사를 창설하여, 소사신천리간 운행을 시작했다.(1931.5.1.) 또 군포장(안 호계동), 반월장(안산건건동) 택시회사도 소사 가는 차가 먼저 운행된다.

일제강점 해방후 농지개혁시 시흥군 20정보 이상 피분배 지주명단 출전 9명 중 군자면이 4명, 수암면이 3명이다. 군자면: 이진홍(원시리574) 정재호(장현리201)윤충환(성곡리124) 이묘남(원시리212) 수암면: 조한영(윤곡리256) 이중영(장산리278) 육훈상(양상리213) 과천면:감성환(관문리112) 김성환 <농지개혁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명부>

이처럼 천석군 같은 대지주의 뿌리가 있고, 선대에서 후원이 있기에 단원이나 강세황 같은 예술가를 길러내게 되는 것이다. 초상화 23점중 시흥출신 인물 중 초상화는 9인 강세황이 8본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인천 주변 50km 내의 대한 폭격은 9월9일~13일의 5일간 집중되었다.

인천을 상륙한 맥아더장군 부대의 선봉주력부대 미제1해병사단 제1연대는 경인국도 남쪽을 택해서 서울로 진격 했는데 소래산 주변을 통과하였다.

인천상륙작전 때 군사지도를 보면 인천 시흥시지역이 WET(축축한) DUMP(상륙함정의임시정박소) MUD(진흙 진창 하찬은 것)로 표시되어있다.

청색해안(Blue Beach) 상륙 지도를 보면 소래포구 좌우지역으로 시흥시 지역이 중요지역이다. 우측 3대대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감제고지를 탈취하도록 되어있었다.

소래포구 북측 송도해안으로 들어와 G중대는 소래염전지대로 공격하고, H중대는 월곶 I중대는 정왕지역 오이도94고지를 공격하는 것이다.

터키여단으로 편성된 공격제대는 1951년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 수리산과 모락산을 공격하였다. 수리산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반월리를 거쳐 소사 또는 도로를 통제 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수리산 전투당시 수암면 수암리 민가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1899년 개교한 오래된 안산 초등학교는 교사 부속건물 일체가 전쟁으로 파괴 되었다.

1988년 12월 31일 시흥군지 (서문 이희승박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시흥의 주택양식은 서북풍을 막고 여름에 강한 서양 볕을 막는 구조로 현대주택디자인의 기초가 된다.

(1) 여섯 칸 겹집 중앙 마루 집(변형) 포동36 박인수 

(2) 일곱 칸 곱은 자(r형자) 중앙대청형(골대문단 집) 포동70 엄원섭 댁

(3) 똬리형 포동36 유사봉 댁 (강화도 등에 분포)

(4) ㄷ자형 포동 새우개 마을

(5) 튼ㅁ자형-1 안형동 88 (서북풍밑 서향빛 차단형 수원 안양 용인등에 나타남) 김태열 댁

(6) 튼 ㅁ자형-2 ㄱ + ㄴ=ㅁ 계수동 건지물 황현휴 댁

(7) ㄱ자형 토담집 조남동 山52 장자터 이정자 댁

1989년 1월 1일 시흥군에 속해 있던 소래읍 수암면 군자면이 시흥시로 승격하고, 1월 5일 개청했다. 시흥군 변방에 있던 곳이 시흥군을 계승한다고 시흥군의 모든 서류를 가지고 간다.

1945년 시흥시 논곡동 227출생한 이승언(李承彦본명 향토사학자. 자료수집가 이한기)의 중재로 그리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리산 시흥시 서측자락은 풍수지리가 좋아 많은 유명인이 묻혀있는 곳이다. 이서구(1899~1981) 극작가, 연출가, 언론인, 본관은 (漢山)서울출생 이나 본적은 안양시이며, 묘지는 시흥시 방산동 山20 사탯말이다. 중요 회곡 작품은 동백꽃(1925) 어머니의 힘 등이 있다.

5060시 안양에서 여름방학이면 송도 바닷가에 트럭을 빌려 단체로 휴양을 간 적이 있었다. 1969~70년 필자가 소대장시 화성시 독지리에서 북으로 보면 아름다운 소래산이 보이고, 인천의 야경도 저멀리 보였다. 소래산은 인천의 진산 (鎭山)으로 主山이며, 옛날에는 이산을 중심으로 산자락에 살았다.

인천이나 소래를 접근 하려면 소래산이 목표이다. 고대인의 오이도유적도 지리상 이점을 이용한 지역이고, 백제도 이 주변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기도도 하며 모시는 산이 소래산이다.

라당연합군 대장 소정방이 산동성 래주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처 소래산을 보면서 높은 간만의차를 이용하여 소래포구를 지나 소래산으로 들어와 지휘부를 만들었을 것이다.

4~5층 높이의 조형물은 배가 출항 및 입항 할 때 기도 드리는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이다.

리오데자네이로의 성모상과 역할이 비슷하다.

마애상은 장군바위라고 부르는 암벽에 선각되어 있는데 소정방 바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하는 생각이 든다. 인천자유공원에는 맥아더장군이 상륙한 기념으로 맥아더동상이 있고, 서울에는 워커장군을 기리는 워커힐이 있다. 동유럽에는 로마군이 사용하던 돌이 깔린 도로까지도 중히 여기고 자기지역이 로마문명이 지나던 곳이라고 필자에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근대에 큰 국제전쟁을 치른 나라이지만, 그 전쟁 관련 유적보호가 약하다. 전쟁유적도 우리의 역사이고 잘 보존해야 한다.

소래포구는 지금도 유명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대중(對中) 왕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포구였을 것이며, 고려시대에도 이 일대는 중국과의 교류뿐 아니라 개경과 마산포 연결되는 중부지역 수운(水運)의 중요지대다.

소래포구를 많이 그린 화가는 이순신장군의 후손 이종무화백으로,그의 화집에 많이 나온다. 박석호화백 등도 소래포구를 즐겨 그렸다.

필자의 처형이 시흥시 정왕동 병원의사로 근무할 때 여러 번 간 적이 있고, 해변에서 송도 쪽을 스케치 한 적도 있었다.

시흥시는 서울대분교 유치로 여러 해 노력해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좋은 교육도시로 나가기 바란다. 과거에 우리가 본 아름다운 해변은 개발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해변 보존과 개발의 균형이 필요하다.

시흥시는 송전선 고압전주 전선 외등 전주 등으로 진창 같고 경관이 거칠어 보인다. 태양광의 도시로 시흥(詩興;시를 짓고 싶은 마음. 또는 시에 대한 흥취 )의 옛 풍광을 살리기 바란다.

월곶역광장 이곳에서 출발하는 광명 안양 성남 강원도 가는 전철이 확정되었다

월곷에서 광명 안양 성남 강원도를 있는 전철이 확정되었으나 도시인구가 현시점 40만 명 선에서 조정되고 양보다 질을 높이는 도시로 나가기 바란다. 시흥군은 1989년 1월 1일 시흥시, 군포시, 의왕시 등 3개시로 분리 승격하면서 폐지되었다.

구 시흥군의 수도(首都)는 안양읍이었다. 시흥시는 시흥군 구서류를 공동으로 정리하여 안양시와 공유하기 바란다.

자연환경회복과 수도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경기북부와 한강이북 서울시를 합하고 구 시흥군 지역은 한성시로 다시 통합하여 나가는 것을 연구하자.

연꽃같은 건축실내 우수건축이다
저작권자 © 건축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