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 금이동 에 사는 평산신씨

신현수 건축사- 어버이날에

신현수 건축사님은 단단하고 기억력 좋고 장수하시는 분으로 오복(五福)을 가추고 부귀다남(富貴多男)하신 분이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고 배가 시키셨고, 건축사사무소를 안양시 만안구청 정문건너편 필자가 설계한 건축 도로측 2층을 분양받아 95세까지 (2017.1.26 ) 하신 분이다.

최승원- 안녕하세요. 지방문화 계승 발전키 위해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평산 신씨 이신대 고향이 어디신가요?

신현수- 1923년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금이리 459  수리산 서북자락 태생으로 약350년 전 13대가 풍수지리가 좋은 수리산자락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신홍균(申弘均)과 송복심(宋卜心)사이의 신현수(申鉉壽)이다.

사남 이녀 장남으로 태어나 아들 사형제를 두었다. 모친은 부산사람으로 인천사람 중매로 결혼하셨다.

최승원- 부산여성이 시흥에서 음식 만들기 등 잘 적응 하셨나요?

신현수- 영리하셔서 시집풍습에 바로 적응하셨다.

최승원- 초등학교 교육은 어떠했나요?

서당에서 3년간 천자문 동문서신(공자학) 통감(공자학) 1권 2권을 배우고 초등학교(현 초등학교)에 갔다. 7~10세는 서당에 가고 10세(만9세) 국민학교(초교)에 입학 했다.

인천에 부천군청을 둔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년 당  한 급씩 6개 반이며 한반에 40명 정도이고 여학생은 5명이었다. 일본인학생중 1명은 과수원집 아들로 이름은 모리모도이고, 교장아들은 졸업 후 인천중학교로 통학하였다. 일본인 선생은 3명이고 교장은 일인(日本人)이다.

최승원- 안산초등학교로 왜 안 갔나요?

집에서 소래초등학교까지의 거리가 9km정도 보다 가까운 8km 정도에 안산초교가 있었으나 행정구역관계로 소래로 다녔는데, 어른은 십리4km 한 시간 걸리는데 초교초급은 3시간 왕복6시간 걸리고 비 눈 바람이 매우 추웠다. 3학년 때 6인치 자전거를 사주셔서 타고 다녔다.

최승원- 초교시 여자 친구는 있었나요?

5학년 때 소래산 밑에 사는 여학생 하용순이 정문에서 기다리다 신겐쥬(창씨개명이름)하고 이름을 부르기에 "왜 그래" 하면 수줍어 했는데 사춘기라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벌써죽어다. 학교가 멀어서 50m새끼줄로 재보니 9km300정도 되었다.

재는 것이 이후 직업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점심은 도시락 먹은 후 등에 메고 뛰면 젓가락 때문에 소리가 난다.

최승원- 겨울에 매우 추웠지요. 옷은 무었을 입었나요?

옷은 핫바지 겨울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여름에는 적삼을 입었다. 우리 동네 50호중 모친은 음식솜씨가 제일이라 일군들이 우리집 일을 우선으로 일해 주었다.

동네 영국제  싱가재봉틀이 있는 집이 한두집 인데 모친은 재봉 잘하고 바느질솜씨가 좋아 초상집에서 모셔가는 솜씨고, 부친이 옷을 입고 잔치에 가면 두루마기가 "아버지 옷이 품격이 제일"이라고 한다고 우스게 소리를 하셨다. 바느질 못하는 부인들이 적삼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1시간이면 지어가고, 푸마시로 하루 품 싹  25전어치 하루 종일10시간이상 일을 해준다고 한다. 여기서 가내 (家內)경제력을 알 수 있고 밥을 잘 짓고 옷 잘 짓고 집잘 짓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다.

 6.25시 폭격으로 집이 불이나 재봉틀 몸체만 남아 을지로4가 서울미싱에 가서 새것으로 만들어 와 가보로 계승한다.

최승원- 천석군은 어느정도 인가요?

신현수- 논은 2400평 200평 한마지기로 12마지기에 종자 한말이 들어간다. 우리의 소출은 50가마 자작농이다. 전라도지방 경작료가 1/2이며  마름이 지키고, 겨울에 쌀이 떨어지면 미리 빌려 먹고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반半이 천석이면 천석꾼이다.

최승원-진학은 어느 학교로 하셨나요.

신현수-중학은 한양공대전신 동아공과(1939년 김연준이 설립) 토목과에 입학하자 부친이 나를 데리고 토목 청부업을 하는 친구네 집에 (돈화문 대궐 행낭 체는 우체국으로 세를 준 집) 나를 데리고 가 "형님 우리아들 인데 형님 집에서 학교에 다니게 해주세요." 쾌히 허락을 받고 들어가니 한옥으로 식모 침모가 따로따로 있는 하숙집이다. 졸업 후 1년간 이집에서 하는 토건회사에 근무하였다.

최승원-일본군대는 언제 가셨나요?

신현수- 2학년 때 중국 노구교에서 일군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훈련 중 총을 쏘자, 중국군도 대응 사격하므로 중일전쟁이 발생했다.

 회사에서 답십리 택지조성공사 현장에서 근무하다 징병1기에 걸려 평양77연대에서 훈련을 받는다.

훈련을 받는 기간중 모친은 훈련중 매주말 소래집에서 음식을 해가지고 2시간30분간 걸어 나와 안양역에서 야간열차로 새벽에 평양에 내려 기와집에 들어가 음식을 데우자고 하니 친절히 해주어 조반도 드시고 매주 면회하게 되었다. 부친은 왜 극성맞게 다니냐고 하니 나는 애 없으면 죽는다고 열심 이셨다. 추석전날입대 1월 제대 4개월 기초 훈련 후 모두 귀가시켰다.

제대 2달 후 오키나와를 미군에 점령당하자 재소집 용산에서 훈련 중 어느 날 저녁에 새 옷 총도 새것을 지급하고

저녁상에 맥주1병 새우튀김이 나오고 식후 용산역으로 끌려 나가다. 화물차에 타니 말똥냄새가 났고 헌병이 문에서 지켰다.

북안양 구름다리 통과 시 언덕이라 기차가 천천히 갈 때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삼랑진에서 미군비행기가 기총소사를 했는데 그림 그리고 설명 지붕 뚤 코 벽을 뚤 코 옆 차벽을 뚤코 바닥에 박히는 총알의 위력을 보았다. 공습 해제 후 부산진에서 내려 저녁 먹고 배 타는 것 뻔한 것 이었다. 부산에서 배타면 남방 전쟁터에서 100% 죽었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흐르다. 이틀 만에 기차로 북상 밤2시 하차 여름인데 초등학교에서 담요 한장씩 주고 자라고해 다음날 늦잠으로 해가 중천에 떳는 데 학교 담 넘어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를 '여기가 어디요' '울산이례요'한다. 울산태화강변150고지 40대가 예비 병력이 포함된 대대병력이 토치카를 만들어 놓고 진지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산에 천막치고 자면서 토치카 지키고 있는데, 나는 대장이 약해서 대장염 앓고 있었다. 보건소의사가 위급 할 때 쓰라고 약을 해주어 대장 청소 후 약을 먹었다. 안 고치면 이질이 되고 일본사람은 이질시 사망에 이르기에 무서워하는 병이다. 대대본부로 쓰는 학교에가 설사가 멎었다. 지금도 짠 것을 못 먹어 김치를 물에 헹 구어 먹는다.

 새벽에 만세소리가 나서  알아보니 전날 일본천황으로 부터 항복방송이 있었다고 한다. 100명중 1/3 이 한국인인데 반도출신 나오라고 해서 나가니 폭동에 대비 일본여자 지켜라 하고 트럭 태워 학교로 가다가, 혼자 과수원 하는 일본부인을 지켜주니 사과를 내놓아 잘 먹었다. 일본은 망했지만 100만 일본군이 있으니 경솔 한 짓 말 라고 했다.

쌀을 양말에 넣어주고 어깨에 두르고 기차는 무료로 타라고 해서 부산으로 가는데 도중에 해운데 외갓집이 보여서 내렸다, 들러야 하는데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여관에서 밥해 먹고 부산역에서 무료로 밤차를 타고 수원에 와 여관에 쌀을 주고 밥을 해먹고 수인선으로 9시 출발 11시 동네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고 가족들은 매우 좋아했다. 동네 징용  2명, 군인 3명중 징용2명이 죽었다.

최승원- 해방 후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세요?

1945년 해방 후 한양대 전문 부 건축과에 편입한다. 당시 서울대와 한양대에 건축과가 있었다. 토목과를 졸업하고 영암선철도공사 7공구에서 측량 및 토목설계를 많이 했다.

최승원-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1946년 24세 때 (美人과) 결혼해서 48년 장남을 낳았고, 지금 장남은 집에서 농사 짓 는다. 모두 아들 4형제를 두었다.

(대부분 건설회사는 일본인 소유였고 우리나라회사는 건축을 주로 하는 오공무소와 토목분야인 장간소 가 있었다. 2011년인터뷰)

서울고공 교수들이 한양대에 와서 알르바이트로 강의 하였는데 유명한 토목과 이상하 교수는 전쟁시 바로 납치되고 아들이 서울공대를 나왔다.

1948년 한양대 전문 부를 나와 이종억 사무소에서 근무했고,

6.25 전쟁시 후방부대가 명단가지고 들어와 유명인사들을 납치해 가기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가 나왔다.

최승원- 집에 옛날 사진이 있나요?

신현수- 전쟁시 집이 폭격으로 불타서 사진 책등 모두 불타 버렸다.(수리산으로 터키군이 공격시 주변민가에 폭격)

6.25때 영국공병대설계사무실( 영연방공병대)에서 토목설계와 측량을 하였다. 유엔군주둔지 토지 건물을 측량 사용료 보상금 지불하였는데, 동경 극동사령부에서 통제하였다. 서울재판소 뒤, 문산 고랑포, 오류동 소사사이 경기도 누에고치 잠업소, 경신고 산속 켈로 부대, 영등포 켈로 부대 등을 측량하였다.

최승원-토목 공부 후 건축을 공부하신이유는?

신현수- 친구 건축사무실에 놀러 갔었는데 친구가 깔끔하게 옷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매력이 있어 전문 부 건축과에 편입하여 공부하였다.

 

최승원- 건축행정제도는 어떠했나요?

신현수-일본강점기시 건축대서사제도가 건축설계를 대행하여 내려오다가

1955년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건축대서사 시험에서 간단한 설계 ㄱ자형지붕 공장지붕틀을 그리고 합격했다. 서울시장이 사업을 허가함( 각도시사가 발행하였다). 그해가을 10월경 민병훈 건축사 사무소에서 대한건축사협회를 구성하였다. 당시 전국64명이등록 사무소를 시작하였는데 64명중 서울이 24명이다.

최승원-건축사법은 언제부터 시작되나요?

신현수- 대한건축사협회에서 제출된 안이 주로 채택 되었다.

1964년 건축법 건축사법이통과 1965년 최초로 건설부에서 실시한시험으로 건축사가 배출된다.

용산에서 설계사무소를 창업했는데 처음에는 소규모 개인건물을 설계하였다.

시흥군 안양읍 에는 조명호건축사가 시작하고, 경기도청회계과 건축계장출신 이석구 전 경기도건축사협회지부장이 있다. 이석구는 70년대 초 퇴직해서 일본과 가까운 조명호(일본인학교 경성공고 후신 서울공고졸업)와 같이 사무소를 했는데, 성남시종합운동장설계가 같이 한일이다. 이석구아들은 홍익대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중요한 실무 책은 건축자료 집성. 고등건축24권 큰판 .적산 시공 등이다.

아파트시공 1번은 아현동 삼익기업이 아파트를 지었고 2번째 내가 시공자가 동광토건 대표 신현수 이다. 이후 김현옥시장시 와우아파트 붕괘 사건이 있었다.

("건설회사는 관리부실로 취소되고 살릴 여고 애썼으나 되지 않았다 건축사협회회장에 출마코자하였으나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도 시 친구가 나중에 갚으라고 담보를 풀어주어 기사회생하였다. 조상호건축사증언)

 

최승원- 사업중 애로사항은 없으셨나요.

신현수-생애 애로사항은 50년전 40대중반 청파아파트를 시공했는데

입주자들이 공사잘못 했다고 시장 실 에 들어가 부실시공이라고 검찰고발해서 감정해서 해소 시킨 일이다.

최승원- 관청로비는 어떠했나요.

신현수- 우리가문은 3대째 술을 안 하기에 접대로 술집에 가면 술을 받아 놓았다가 기생도움으로 슬그머니 술을 버리는 방법으로 하였다.

최승원-시흥군청을 보셨나요?

신현수-시흥군청이 영등포역에서 인천으로 가다보면 왼쪽 단층 적벽돌 건물이다. 박달동 앞 안양천보 공사를 했는데 지금도 있다.

시흥군청에서 안양시도시계획을 했는데 함경도출신 토목계장 김성환이 용역을 주지만 그는 감독을 했다. (안양지역건축사회는1965년12.3일 창립되었다.)

최승원-안양 개업 시기는 언제인가요?

신현수-1979년 1월 용산에서 안양으로 옮겨 신현수, 양하섭(제주도사람), 신현범(인천사람)합동사무실(정부지시로)을 개업했다. 안양으로 내려올 때는 몸이 약해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안양시에서 다시 시작 설계한 것은 의왕시도서관. 동사무소4군데 일했는데 94산본 1동사무소, 시흥시 매화리 동사무소 등이다.

최승원- 안양지역건축사협회에서 단체로 안산에 모내러 간적이 있습니다. 가끔 나에게 모내기 일을 같이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현수-1986~7년경 권순재 건축사 회장 시 신건축사 소유 논에 건축사들이 모내러 간적이 있는데, 가끔 모내기 일을 같이 했다고 이야기했지. 그 논이 일부고속도로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가지고 있는데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 박달동상가는 손주에게 주었어.

산에 열심히 다녀 내장은 좋아 졌는데 무릅이 약해졌다.

살다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었어. 나는 보통 건축사이지만 지방 건축史다.  아들에게 이야기하니 아버지 책 내 세요 했다. 대표작으로 ‘용산극장’을 설계하였으며 서울시에서 2번째 아파트인 숙대앞 ‘효창아파트’가 있다.

이 대화는 지방문화의 보전을 위해 2017년1월 하순 폐업 직후 3번 만나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메모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사무실실내
신아건축사사무소 최근작 협력설계및 시공 안양 스타벅 비산점

 신아건축사사무소 신현수 최근작 '협력설계및 시공' 안양 스타벅 비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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