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누가 집을 짓는가?

신    동    규

- 경기과학기술대학교 건축인테리어과 교수

- 건축학 박사

- 건    축    사

- 건축시공기술사

 

누가 집을 짓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환자의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환자가 의사를 찾아 왔다. 의사는 방사선과와 진단실의 의료 자료를 기반으로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간호사는 주사를 놓고, 약사는 제약회사에서 만든 약을 조제하였다. 그 약을 먹고 환자가 회복되었다면 누가 병을 고친 것인가? 병원을 선택하고 처방된 약을 시간 맞추어 먹고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한 환자인가? 진단에 도움을 준 방사선과 의사인가? 약을 제조한 제약회사인가? 또는 약사인가? 명확하게 병을 고친 사람은 진단을 담당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한 의사이다.


마찬가지로 집을 짓는 사람은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하여 건축의 방향과 목적에 맞는 기능과 형태를 정하고, 그에 맞는 기술적 해결 방법을 제공한 사람이다. 과거에는 대목수와 같은 기술자가 그 업무를 수행했고 현재에는 건축가가 하는 일이다.


건축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예술적 재능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건축물을 설계하고 설계에 따라 건물을 완성하는 과정을 감리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건축가(建築家)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건축과정에서 건축주의 의도를 반영하여 설계와 감리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제도권에서 건축사라 부르는 직업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사회에서 건축가는 집을 짓는 주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집을 짓는 사람이 건축가라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것을 느낀다.


건축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는 수 없이 많다. 서울시청 설계 당선자 유걸씨가 건축과정에 배제되었다가 여론 때문에 총괄 건축가로 지명되었지만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준공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들러리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 공공건축은 공유된 목표가 없이 누군가의 지시만을 따라가게 된다 (http://annews.co.kr/100158587956)”고 한 그의 자조적인 비판을 들어 알고 있다.

국립 중앙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는 개관 리셉션에 초청되지 못했으며, 상암 월드컵 경기장 준공식 때에도 건축가의 이름은 호명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다.

필자 역시 과거에 건축사업무를 수행하면서 건축설계 안을 공무원과 시공사의 입맛대로 변경하는 것을 수 없이 목격하고 착공식, 준공식과 같은 자리에 들러리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건축사는 비전문가인 건축주의 요구사항을 행정적이고 실무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필자는 건축가에 대한 사회적 위상과 건축설계 분야의 후진성을 논의 하려고 이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건축의 시작인 건축방향과 개념을 수립하고 계획하는 사람이 건축가라는 사실이고, 따라서 집을 짓는 주체가 건축가라는 변함없는 사실을 주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집을 짓는 일을 그 시작부터 되짚어 보면 건축가의 역할이 가진 근원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1. 기술자에서 건축가로 
아모스 라포포트(Rapoport Amos, “House Form and Culture”,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9)는 전통사회 건축과 현대산업사회 건축을 구분하면서 토속건축(vernacular architecture)과 고급설계건축(grand design architecture)로 명명했다. 고급설계건축은 아래의 표와 같이 건축주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념적인 건물 또는 건축가의 능력과 건축주의 우월한 취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어진 것들로 대체적으로 독창적이고 전문적이며, 전문가에 의해 설계되어 완결된 형태를 보인다.

반면 현대화 이전의 대다수 건축물은 토속건축으로 원형 또는 원형이 변형된 단순 형태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지을 수 있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지어진 것들이다. 토속건축에서 건축은 같은 문화권이라면 건물 유형이나 형식, 원형, 재료까지도 모두 공유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으로 특별히 정해야하는 것은 건축주의 특별한 요구조건, 경제수준, 대지와 지형과의 관계 등만 결정하고 기술자와 건축주 양쪽이 원하는 조건이 모두 일치하면, 하나의 원형이 정해지고 나머지는 수정∙보완하게 되는 것이었다. 불과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건축물은 일부 지배층의 건축물이나 종교건축물을 제외하면 토속건축이 일반적이었고 대다수를 차지했다.

우리사회에서 건축가의 작품 영역인 고급설계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된 1960년대 이후이며, 제도적으로는 건축법이 제정된 1962년 이후이다. 이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스스로 또는 마을 사람의 협동 작업으로 지어왔다. 특별한 기술도 특별한 재료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건축법이 제정되면서 집은 허가의 대상이 되고 설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건축사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건축사라는 직업이 제도적으로 탄생하였으나 아직도 대부분의 건축물은 상업화된 집장사와 건설회사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계되고 지어지고 있다.


필자는 우리사회에서 건축가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우리 도시건축의 일천한 역사와 급속한 산업화에서 원인을 찾는다. 서양에서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비교적 오랫동안 현대화 과정을 거쳤고, 전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현대건축, 즉 고급설계전통이 확립된 것도 우리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부모님의 세대, 아니 우리세대의 일부까지도 토속건축에 익숙한 세대였으며, 건축의 주도적 역할이 기술자에게 부여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건축가는 그 과정에서 필요한 행정절차를 대행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은 소규모 주택, 상업용, 산업용 건축물에 특히 일반화되었다.


또한 한국전쟁과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집은 늘 부족했고, 공급자가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는 게기가 되었다. 집은 지어 놓기 무섭게 팔리는데 건축가의 설계와 창작의지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합예술가로서의 건축가의 지위는 집의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확보될 것이며, 건축설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앞당겨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2. 사용자와 공급자 사이에서
어쩌면 건축가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처우의 개선이 아니라 건축가가 서비스해야하는 대상이 누군가를 다시금 명확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전통사회 건축에서는 집을 짓는 사람이 사용자이고 건축을 책임지는 건축가이므로 사용자의 의견이 잘 반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분양을 목적으로 하는 건축물은 사용자도 모르는 채 자본가와 건설업자, 디자이너인 건축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용자의 욕구가 건축가와 자본가들이 수행하는 계획과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아래의 그림과 같이‘사용자와 공급자, 사용자와 건축가 사이에 욕구의 간극’이 발생한다.(Jhon Zeisel, Inquiry by design, Tools for environment-behavior resear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우리나라 사람의 60%가 살고 있는 공동주택의 집들이 이렇게 사용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가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근거도 찾을 수 없으니 당연히 돈벌이에만 급급한 ‘설계사’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만 한다.

또한 건설업자를 집을 짓는 주체로 인식하는 건축주는 집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찾는 것이 아니고 시공업자를 찾으며, 건축가는 일감을 가져 온 시공자와 건축주의 요구조건을 우선하고, 사용자의 요구는 건축가의 간접 경험을 토대로 설계에 임하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건축주 또한 자기 가족이 살아갈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경제적 투자가치를 우선시 하므로 최종 사용자와 사회에 대한 배려는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도 사용자들의 요구사항이 설계에 반영되지 못하는 간극(gap)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축주의 요구만 반영할 것이 아니라 실제 거주자와 불특정 다수 사용자의 요구와 이웃을 배려해야하는 소통의 전령사가 되어야 한다. 

 

3. 집을 누가 짓는가?
집을 누가 짓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현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도시 건축물들, 특히 소규모 주거용과 상업용 건축물은 창작과 미적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무자격 건설업자와 개발업자들이 경제성과 공급을 우선에 두고 만들어낸 그야말로 건물(building)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받은 건축사들조차 이들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순응하면서 무미건조하고 개성없는 도시를 만들어 온 자랑스럽지 못한 흔적을 남겼다. 앞으로 건축가는 주도적으로 건축물의 창조 과정을 이끌어 가야하며, 사회적 요구와 건축의 긍극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추구할 때에 좋은 건축과 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다.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현실적으로 접근한 이상림은 “건축가는 건축주가 원하는 바를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사실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다음이 사회가 원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 마지막이 땅이 원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어느 곳이든지 그곳에 제일 어울리는 건축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건축가의 의지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고려 대상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건축의 방향이다.”(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 부키전문직리포트)

한편 안도타다오는 건축의 과정을 투쟁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건축은 투쟁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건축이란 투쟁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과정이며, 완성된 건축은 그 과정의 결과에 불과하다. 건축은 투쟁의 예술이다.”(안도타다오, 도시의 방황, 이기웅 옮김, 오픈하우스)


건축설계과정을 실무적으로 종사해 본 사람이라면 건축가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뼈 속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업무의 수주에서 계획, 설계, 감리, 준공의 전 과정을 겪어본 사람은 건축물의 창조 과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외부적 투쟁의 대상 뿐 아니라, 건축가의 창작의지와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현실 속에서 간단없는 투쟁을 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 할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건축에 대한 지향점이 올바른지와 거주자와 사용자의 안전, 편리, 행복을 향한 투쟁심이며, 두 가지가 정립될 때에 집을 짓는 주체로서 건축가가 바로 서는 게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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