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悲運)의 명성황후이후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

건축사부 이구

비운의 왕자 이구 (1931~2005)

그는 1953년에 맥아더장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중국계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IMP)의 회사에 취직했다. 1958년 설계사무소 사무실에서 만난 행정요원으로  8살 연상의 여인  줄리아 멀록(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한국명은 이주아)과 1959년 결혼한다.

미국으로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 (말년 광명시에서 사회복지 법인 명휘원을 지원하면서 장애자에게 도자기 섬유공예등을 가르치다.)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 라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홍익대학교 나상기교수를 루이스칸에게 소개하여 펜실바니아 건축과에서 공부하게 하였고.이후 1963년 귀국해 서울공대건축과에서 한국어를 못해 영어로 강의하면서 한동안 열심히 건축설계를 하였다. 1968년에는 국회의사당 신축설계를 위해 윤장섭 정인국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1972년에는 새문안교회를 설계하여 서양교회양식에 전통미를 가미하여 한국적 전아(典雅)의 풍취를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안양교도소 신축설계에 참여하나 1973년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후손 없이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년에 이혼했다. 아내는 워커힐호텔 기념품 샾에  장사하며 신분을 지키고 이구를 생각하였지만 재회하지 못하고 비운의 장을 마감하였다. 

옥돌 같은 새문안교회 또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새문안교회 연단
새문안 교회 실내 사진 최승원
전면사진 사진 ;최승원  바람과 함께 사라진 건축. 조영 깊은 천년 건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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